8000억원의 계산법   [정경희의 곧은소리]삼성의 순수 신규출연금 2200억…언론 3.6배로 '과대포장'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수십 년 전 광복 후만 해도 "무슨 척진 일 있느냐"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척지다'는 '서로 원한을 품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원래 '척(隻)'이란 '소송당사자'를 뜻하는 말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의 입장에서 보자면 피고가 '척'이 된다. 소송당사자로 법정에 서고 보면 원한을 사게 마련이어서 '척지다'는 '원한관계'와 동의어(同義語)가 된 것이다. 이처럼 법률적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생활언어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소송행위가 흔했음을 뜻한다. 아닌 게 아니라 "구한말 개화기에 일본인 재판보좌관들이 와서 거의 모든 권리분쟁이 소송으로 제기되는 것을 보고 한국인은 권리의식이 높다고 평가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박병호 교수·서울대). 그것은 이 나라에서 법치주의의 뿌리가 깊다는 뜻도 된다. 조선왕조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서문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천지 사시(四時)에 맞춰도 어그러지지 않고, 전성(前聖)에 고증해도 틀리지 않으며, 먼 훗날 성인이 다시 나온다해도 자신이 있음을 알 수있다…모두 이 헌장(憲章)을 따라 그르치지 않고 잊지 않는다면 왕업(王業)이 유구해질 것이다". 이 서문은 지금으로부터 537년전인 예종 1년(1469년)에 씌어진 것이다. 그것은 성문법(成文法)을 최종적 규범으로 삼는 법치주의가 국가경영의 기본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3.6배 부풀려 과대 포장 왜구(倭寇)라는 해적의 나라에서 온 구한말 재판보좌관은 이 나라가 일본과는 달리 '법이 지배하는 나라'였음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흐른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이 나라의 랭킹 1위 재벌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사재 8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해서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처럼 언론매체들이 펄쩍 뛰었다(7일 발표). 삼성은 또 구조조정본부에서 법무실을 분리하고,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공정거래법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과 삼성SDS 신주인수권부 사채(BW)에 대한 증여세부과취소소송 등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취하한다고 했다. 삼성은 금융계열사의 사외이사를 '과반수 이상'으로 확대한다고도 했다. 이 가운데 언론이 대서특필 한 것은 "8000억 사회환원"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8일자)는 사설에서 말했다. "재산을 아무 조건없이 사회에 헌납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달에 유해(有害)한 전례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강압적 군사정권 하에서 번번이 되풀이되던 재산헌납의 과거사"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8000억의 사재를 내놓겠다"는 삼성오너 일가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바친 것이었다. 그러나 '8000억'중에는 이미 4년전인 2002년에 설립된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기금 4500억원이 포함된다. 이번에 이건희 회장 일가가 새로 내놓는 사재는 정확하게 말해서 3500억원이다. 사고 팔 수 있는 것과 안 되는 것 그나마 이 돈도 이건희 회장 자녀들이 계열사 주식을 헐값 인수해 얻은 이득 1300억원, 그리고 세상을 뜬 이윤형씨 재산 등 가족들이 내놓는 2200억원을 포함한 액수다. 다시 말해서 순(純)신규 출연금은 8000억중 2200억이라는 얘기가 된다. "8000억 사회환원"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은 3.6배나 부풀린 엉터리 과대포장이다. 뿐만 아니라 삼성의 돈 잔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삼성은 거액의 돈더미를 이회창 후보를 위해 차떼기로 내놨었고, 그것도 모자라 지체높은 언론권력자를 통해 손으로 들기도 힘든 돈더미를 보낸 사실이 안기부 도청테이프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다만 심부름을 했던 언론권력자가 "기억에 없다"고 묵비권을 행사한 뒤 수사가 중단됐다. 게다가 언론은 줄기세포파동에 휩쓸려 재벌, 정치집단 그리고 언론권력이 3각유착으로 저지른 불법선거자금 거래를 깨끗이 잊어버렸다. 민주주의란 법치요, 법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큰 원칙을 전제로 한다. 차떼기에 이어 도청테이프에서 드러난 거액의 불법선거자금 혐의가 '없던 일'로 치부될 수는 없다. '8000억'을 내세우는 호들갑으로 묻어버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국가·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자면 무엇보다도 '법에 의한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 행여 언론이 법의 정의를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팔고 다니는 거리의 행상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정경희; 언론인, 한국일보 기자, 외신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 1992년 '위암언론상', 2002년 '송건호 언론상' 수상. 1996년 8월부터 <미디어오늘>에 '곧은소리' 집필을 맡고 있음. 주요 저서로 '한국고대사회문화연구'(1990), '정경희의 곧은소리'(1999), '실록 막말시대-권언 카르텔의 해부'(2005)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