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위해 제보했는데 8년간 조직에서 ‘왕따’당해”
안산시 종합운동장 설계 비리 고발자의 사연
미디어다음 / 조혜은 기자
‘조직의 배신자’ 취급 받으며 고통스러웠던 지난 8년
김봉구씨는 작년 12월 반부패상을 수상했다. 수상식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가 김씨) [사진=연합뉴스]
“윗선에서 직원들에게 ‘인식교육’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조직의 배신자라고 하는 거죠. 사람들이 뒤에서 쉬쉬하는 것을 항상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가까이 오려 하지도 않고 멀리 피해 다녔습니다”
김봉구 씨는 경기도 안산시 내부 비리를 고발해 부당 인사 발령 조치를 당한 뒤 안산시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26일 승소했다. 97년부터 8년 동안 끌어온 내부 비리와의 오랜 싸움이 일단락된 것이다.
김씨는 지난 98년 내부 비리를 고발한 이후 줄곧 ‘왕따’를 당해왔다. 그의 사연은 이렇다. 97년부터 안산시청 시설공사과 계장으로 일하고 있던 김씨는 안산시 종합운동장 설계 용역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안산시는 종합운동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IMF 사태로 건립비용조달이 불투명해졌다. 김씨는 기본 설계만 우선 정산처리 하고 나머지는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송진섭 안산시장은 기본 설계를 포함한 실시 설계까지 함께 하라고 지시했다.
실시 설계는 각종자재와 시공공법 및 금액이 표시되는 설계. 실시 설계까지 하고 난 뒤 오랜 시간 동안 건설을 보류하면 설계에 표기된 자재의 단종과 시공법의 변경 및 각종 금액의 변경 등으로 설계의 의미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보류될 공사의 실시 설계를 하는 것은 거기에 들어가는 예산 39억원을 날리는 꼴이었다. 김씨는 실시설계의 보류를 거듭 주장했지만 김 씨에게 돌아온 것은 부시장과 설계를 담당한 용역 업체 사장의 심한 욕설과 모욕적인 질타 뿐이었다.
“공무원 생활도 내년이면 30년입니다. 그때까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욕은 처음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그냥 눈 한번 딱 감으면 되는 일인데 그만 둘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미 시작한 일인데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해보자는 의욕이 생기더군요”
“예산 낭비 막기 위해 설계 중단 제안하자 전공과 상관없는 곳으로 발령”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씨는 관련 내용을 감사원에 자문했다. 자문 결과 사업 중단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들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씨에게 돌아온 것은 상수도사업소 이전 발령이었다. 김씨는 “전공이 토목인데 전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생소한 일을 하라는 셈이었다”며 “용역업체와 부정한 관계가 없지 않고서는 시청이 이렇게 나올 수 없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상수도사업소에서 일하던 동안 종합운동장의 실시 설계는 다시 진행됐다.
상황이 이쯤 되자 그나마 주변에서 힘이 돼주던 몇몇 공무원 동료들도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런 김씨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가족들이었다. 김 씨는 “내부고발자 가족의 고통은 당사자들 만큼이나 크다” 며 “매번 승진에서 탈락하고 좌천 인사 발령을 받아 힘들었을 텐데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아내와 아이들은 오히려 나를 자랑스러워 하며 격려했다” 고 말했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시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한 김씨는 참여연대를 찾았다. 2002년 참여연대와 공동으로 부패방지위원회(부방위)에 안산시의 행태를 고발했다. 그러자 안산시측은 이번에는 안산시 상록구 반월동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김씨는 이를 부당한 보복인사 조치라며 부방위에 원상회복 조치를 명령해 달라고 신청했다. 부방위는 김씨의 인사 조치를 시정하라고 명령했지만 송 시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방위는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안산시에 대해 500만원의 과태료를 매겼지만 안산시는 과태료 부과가 오히려 부당하다며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에 소송을 냈다. 이 소송에서 안산시는 패소해 다시 항소했지만 이 역시 기각됐다.
김 씨의 제보로 안산시장과 용역업체간 비리에 대한 수사도 이뤄졌다. 검찰의 내사 결과 송 시장은 종합운동장 설계와 관련해 용역업체로부터 2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올해 5월 불구속 기소됐다.
이 후 김 씨는 참여연대와 함께 안산시장을 상대로 인사상 불이익과 명예훼손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며 5000만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26일 법원은 피고인 송 시장이 원고인 김씨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김씨는 “일심에서는 승소했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을 보면 송 시장이 또 항소 할 것”이라며 “항소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만약 혼자 힘으로 시를 상대로 싸웠다면 지금과 같은 좋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며 “참여연대와 부방위, 반부패국민연대 등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공익제보자 보호 위한 부패방지법 개정 필요”
김 씨의 소송을 도왔던 참여연대 투명사회팀 이재근 간사는 김씨의 사례에서 드러난 부패방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행 부패방지법에는 내부고발자에 대해 인사보복이 이뤄져도 이를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과태료 처벌에 불과하다는 것. 지난 9월 부방위가 입법 예고한 부패방지법 개정안에도 신분상 불이익조치에 대한 원상회복 명령을 거부했을 때만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이 간사는 “원상회복명령을 거부했을 때는 물론이고 보복행위 자체를 형사처벌할 수 있어야 내부고발자가 실질적으로 보호 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김 씨는 올 해 5월 안산시의 비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안산 시민들의 따스한 격려가 쏟아졌다. 판결이 거듭되자 시청 공무원들 가운데도 그에게 “힘내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한 두 명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지금 같은 공무원 조직에는 희망도 미래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며 “공무원 생활 30년이 되는 내년에 공무원을 그만 둘 것” 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래도 이렇게 재판 결과가 나와 마음의 부담을 덜었고 여전히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며 “앞으로도 나와 같은 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다시는 없도록 하루 빨리 관련 법률이 개정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안산시는 이번 재판에 대해 항소를 할 계획이다. 안산시 관계자는 “김씨를 동사무소로 발령하면서 인사위원회도 열지 않았다고 김씨가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며 “또 동사무소 사무장으로 발령한 것은 결코 하향식 인사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송 시장의 뇌물 수수 혐의와 관련, “검찰에서 잘못 수사했다” 며 “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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