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송유관협정 반세기 대물림 낡은 한국종단송유관 관리 넘겨받은 한국, ‘책임’만 잔뜩 “기름 새는 송유관, 계속 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낡은 한국종단송유관 폐쇄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한국종단송유관(TKP)의 모든 소유권을 넘겨받은 국방부는 송유관을 계속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잇단 기름유출로 문제가 된 대구비행장∼왜관(28km) 구간과 인덕원∼평택(66km) 구간은 다른 곳보다 폐쇄요구가 높지만, 국방부는 시민단체의 폐쇄 요구에 대해 “미군쪽과 협의없이 폐쇄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송유관의 폐쇄 여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1992년 주한미군과 체결한 ‘한국종단송유관 이양합의각서’ 때문이다. 국방부가 지난달 박찬석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보낸 합의각서 내용를 보면 “송유관의 일부 구간이라도 폐쇄될 경우, 대체수단에 의해 주한미군 유류수송을 계속하여 제공한다(5조)”고 해놨다. 또 “주한미군이 평시 운용 재고수준에 나쁜 영향을 끼치거나 고갈될 정도로 송유관 또는 송유관의 일부가 폐쇄될 것이 예상되는 경우에, 국방부는 주한미군과 합의해 주한미군 수요를 지원할 방안을 강구한다”고 되어 있다. 주한미군이 기름수송을 위해 써야 할 구간이 폐쇄될 때, 한국정부는 대체수단을 제공하고 변상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한국정부 또는 그 대리인의 과실에 기인하여 발생한 TKP 운영 및 또는 송유물량의 중단에 대한 손해에 대해서는 미 정부에 변상한다.”(6조) 합의각서에 따르면, 국방부는 사실상 한국종단송유관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지만 맘대로 할 수 없는 처지다. 전국적 송유관망이 없던 92년 정부는 주한미군으로부터 한국종단송유관을 넘겨받으면서 유류 수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이익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주한미군은 한국종단송유관을 넘겨주고 나서 손해본 것이 없다. 합의각서를 체결하기 전 자신들이 쓸때처럼 기름수송에 우선권을 받았고, 송유관 유지보수에 따른 비용지출도 없어졌다. 결국 송유관 부식으로 인한 송유관 유지 및 보수 비용과 기름누출에 따른 환경오염 복구비용까지 감안하면 국방부가 주한미군으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종단송유관은 이익보다는 피해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 8월9일 정부와 주한미군이 한국종단송유관(TKP)을 남북종단송유관(SNP)으로 대체하는 것을 뼈대로 한 ‘주한미군 유류지원체계 전환에 관한 합의서’에도 송유관 폐쇄에 따른 철거 및 오염토양 복원 등에 관한 내용은 쏙 빠져 있다. 송유관을 폐쇄하기 위해서는 송유관 터 소유자에 대한 보상을 하고 송유관 철거비용과 오염된 토양 복원 등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이런 비용을 따지면 한국정부가 미군으로부터 송유관을 넘겨받아 생긴 이득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합의각서가 ‘불평등한 협정’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중요사안을 결정하면서 정부는 국회 동의를 받는 조약이 아닌 합의각서로 만들어 정식절차까지 무시하고 미군의 편의를 봐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은 “국민에게 비용부담이 돌아가는 것은 합의가 아닌 조약으로 만들어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도, 주한미군과 국방부는 한국종단송유관을 합의수준으로 협정맺었다”라며 “이는 합의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최 의원은 또 “주한미군과의 불평등한 협정은 1964년 맺은 석유협정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석유협정을 보면 주한미군 사령관의 대표는 한국 내의 석유제품 취급·저장 및 배분시설에 출입· 시찰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진다고 돼 있다”면서 불평등조약의 대표 사례라고 지적했다. 최 의원의 지적에 따르면, 한국은 40년간 불평등한 조약을 아무 말없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최 의원은 “잘못된 과거의 석유협정은 이제라도 고칠 필요가 있는데 현 정부에서조차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뒤 “한미간의 송유관 관련 합의는 대외적인 조약으로 바로잡을 수 있도록 문제제기를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이승경 기자 yam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