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6일 목요일, 흐린 가을 하늘 구당은 바쁘다. 침을 놓고 나면 바로 이어 해당 침자리 바로 아래 혹은 옆에, 쑥을 말아 뜸을 뜬다. 쑥을 참깨만하게 말아서 살갗에 올려두고 하나하나 불을 붙인다. 쑥이 타들어갈 때 최고 온도는 약 섭씨 60도. 비교적 낮은 온도지만 혹시 환자가 뜨거움을 느낄까 봐 노심초사한다. 쑥이 꺼질 때까지 그 주위를 손가락 세 개로 지그시 눌러 준다. 고통을 분산시키기 위한 구당의 고안품이다.   구당의 뜸 시술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장진영 씨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다. 적어도 이 순간은 어떤 병마도 그녀를 침범할 수 없도록 구당은 정성을 모은다. 감히 누가 그녀를 폐허로 이끈단 말인가! 오늘도 치료가 시작된다.   태충, 양릉천, 거궐, 중완, 좌양문, 천추, 음교, 합곡, 동자료, 지창에 자침. 정해진 자리에 뜸 다섯 장. 침뜸 치료가 끝나면 오늘 장진영 씨는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향한다. 내시경과 CT 촬영이 앞당겨졌단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치료에 임해 온 장진영 씨지만 오늘은 그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다. 치료가 계속된다. 곤륜에 자침. 위중, 신유, 비유, 신주, 흉추 4번 극돌기 하, 신도, 지양, 격유, 천료, 천종. 뜸자리마다 뜸 다섯 장 시술. “떨리네요. 그러면 안 되는데. 최악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대비하고 있어요.” “진영 씨, 지금껏 잘 해왔잖아요. 잘될 겁니다.” 별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장진영 씨는 이미 영화사 정승혜 대표로부터 항암 치료가 가져올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해 들은 상태다. 그녀는 흔들리고 있다. “저, 내일은…… 여행 가려고요.” “아…… 네. 좋은 생각이네요. 어디로 갈 거지요?” 내가 물었다. “음…… 일본이나 홍콩이나……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좋겠다. 언제고 떠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나는 철없는 아이처럼 일부러 너스레를 떨어주었다. 어디로 갈지, 얼마나 있을지 아직 계획도 없으면서 그녀는 오늘 검사 결과를 듣고 어디로든 도망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어디로도 도망할 필요가 없게 되기를 기원했다. 오전 10시 반. 출입처에 나가 있는데 장진영 씨의 여고 동창 김 이사에게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이 너무도 차분했기 때문이다. “저…….” 막 검사가 끝났단다. “뭐래요? 뭐라던가요?” 내가 다그쳐 물었다. “내시경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깨끗해진 것 같았어요. 지난번에 했던 내시경 사진과 비교를 해봤는데 깨끗해지고 확실히 좋아졌어요.” “의사는 뭐라던가요?” “의사는 다음 주 화요일에 CT 결과까지 나오면 만나기로 했는데, 우선 내시경 하시는 의사 선생님께서도 깨끗해진 것 같다고 하셨어요.” 뭔지 모를 감정이다. 조심스럽게 스믈스믈 기쁨이 밀려왔다.   “담당 교수님께서도 진영이한테 전화로 좋아진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대요. CT까지 보고 나서 얘기해야겠지만, 의사들이 많이 좋아졌다는 소견을 전해 줬다네요.” 전화를 끊고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작은 빗방울들이 삼청동 감사원 기자실 앞마당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기록자로서의 중심을 지키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지만, 사람 일이 어떻게 그리 객관적일 수 있을까. 잠시 취재수첩을 내려놓고 기쁨에 내 몸을 적셨다. 오랜 두려움과 초조함 끝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도였다. 손톱만한 위안, 잠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잠정적인 것일지라도 다만, 감사할 뿐이었다.   구당에게 전화로 김 이사와의 통화 내용을 전했다. 구당도 기뻐했다. 세상사 오랜 싸움에 지친 구당. 돌멩이를 좋아하는 그는 죽어서 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끊었는데도 전화기 너머로 구당의 허허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가을비가 정말 비처럼 내린다. 점심식사 직전, 이번에는 장진영 씨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도 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장소는 홍콩이란다. ‘세상으로부터 도망하는 마지막 여행이 아니라 새로움을 설계하는 첫 번째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뻐했다. 짧지 않은 투병 생활이 준 첫번째 선물일 것이다. 뜸을 꼭 챙겨 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식사 후에 낙엽이 쌓인 삼청동 거리를 혼자 걸었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쓰다 버린 행주처럼 자꾸 구두에 거치적거린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낙엽들을 피해 걸었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암세포 대신 가슴속에 새 희망을 키워 가고 있는 장진영 씨. 그녀가 오늘 오랜 악몽에서 벗어나 홍콩으로 떠났다. 비영리 민중의학인 침뜸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공개 치료가 이뤄졌고, 나는 달리 적당한 사람이 없어 치료의 기록자로 동원된 것 뿐인데, 시간은 이리도 모든 걸 익숙하게 만들어 준다. 새벽 임상취재라는 ‘고역’에서 잠시 해방되어 기쁠 법도 한데, 무슨 할 일을 빼먹은 사람처럼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온다. ... ‘기록할 것 없는 빈 새벽에 홀로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고 적다. <알려드려요> - '영리병원 반대'와 '민중의학 침뜸 보급' 위해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희망이 세상을 고친다>(나무와 숲)를 매일 연재합니다.   - <환자가 병원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 돈 들이지도 않고도 건강을 도모할 수 있는 침뜸의 소중한 진실, 함께 지켜주세요. 읽으시고 공감되시는 분, RT 부탁드립니다. - 장진영씨에 대한 치료는 2008년 9월28일부터 12월 25일까지 3개월간 매일 이뤄졌습니다. 연재 역시 2011년 9월28일부터 12월25일까지 이어집니다. - 우리의 오늘은, 3년전 장진영씨에게 그토록 절실했던 하루였답니다. 그녀와 구당의 대화를 통해, 당신의 하루가 더 근사해지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