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3일 월요일, 죽여주는 가을 하늘 “김영삼 대통령에게 내가 얘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치료를 준비하던 구당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래서 물었다. “할아버지,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말이에요?” “김영삼 대통령 때는 삼청동 안가 쪽 뒷길을 통해 청와대 왕진을 다녔단다. 심지어 청와대 집무실에까지 들어가서 치료를 했다. 그때 사람들이 그러더라. 집무실에서 치료한 의사는 나밖에 없다고 말이지. 참.. 그때는 그랬다.” 치료가 시작됐다. 태충에 자침. 삼음교, 양릉천, 거궐, 중완, 좌양문, 천추, 동자료, 지창, 합곡에 자침. 정해진 자리에 뜸 다섯 장. “아…… 집무실에서 치료하는 광경이 상상이 가지 않네요.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셨어야 했다는 거예요?” 재차 물었다. “정부가 약속했던 침구사법을 제정해 달라고 말이야. 그걸 얘기했어야 했는데, 당시에 나는 대통령은 법을 만들 수 없는 줄 알았단다. 국회의원들만 법을 만드는 줄 알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지.” 아쉬운 얼굴로 조금 풀이 죽어서는 이내 침을 잡는다. 진영 씨를 돌아눕힌다. 곤륜에 자침. 위중, 양관, 신유, 비유, 천료, 흉추 3·4·5·7번 극돌기 하, 천주, 풍지에 자침. 정해진 자리에 뜸 다섯 장. 뱉지못한 말들은 세상의 돌이 되어 일어나리라. 2008년 11월 4일 화요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춘천에 첫 얼음 어스름 새벽. 치료실에 영화제작사 정승혜 대표가 와 있었다. 죽음과 동거해온 그녀. 지금 이 시각만을 밤새 뒤척이며 기다렸을 거다. 긴 밤 홀로일 수밖에 없는 복합암 환자, 그녀의 밤은 얼마나 길었을까. 구당 선생이 밝은 모습으로 정 대표를 병상으로 안내한다. 촉진이 시작된다. “상호야, 여기 봐라. 동계가 심하다. 삼초유를 잡아 줘야 한다.” “할아버지, 정말 빠르고 강하네요.” 직접 만져 봤다. 정말 그랬다. “백 번 이상 뛰는 것 같구나. 그간 어떻게 참았니?” 구당이 정 대표에게 묻는다. 정 대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선생님, 그래도 뜸 뜨니까 훨씬 견디기가 나아요. 뜸 뜨고 일주일 뒤부터는 옆구리 통증이 없어져서 오랫동안 먹었던 약을 끊었어요." "그래?" "네.. 정말이요. 그런데 약을 일부러 끊으려고 끊은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아참! 내가 약을 안 먹었지’ 그러면서 지금까지 하나도 안 먹은 게 된 거지요. 근데 항암 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여기가 조금씩 아파요.” “아파도 예전과는 다를걸?” 구당이 물었다. “맞아요. 예전에 비해서는 양반이죠.” 정 대표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옆구리 통증이 어디서 왔는가 하면, 이 뒤 척추 쪽에서 생겨나 옆구리 쪽으로 흘러 내려간 거다. 여기가 아프니, 안 아프니?” “아…… 거기가 아파요.” “그래, 그럼 여기에 뜸자리를 좀 잡아 주자.” 구당은 영대, 지양, 흉추 8번 극돌기 하 외에 정 대표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뜸자리를 세 개 추가해 주었다. 독유, 격유, 췌유(흉추 8번 옆 1.5치) 옆에 새로운 뜸자리가 생겼다. 침과 뜸자리가 늘어난다.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뜸자리가 훈장처럼 늘어간다. 곤륜, 신유에 자침. 영대, 지양, 흉추 8번 극돌기 하에는 심자가 이뤄진다. 이어 독유, 격유, 췌유에 자침. “이 혈자리들이 옆구리 통증을 줄여 줄 게다. 또 갈비뼈의 부기를 빼주고 동계도 잡아낼 거야. 그러니 계속 뜸을 떠라.” 입으로 혈자리에 대한 설명을 해주며 손으로는 시술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폐유, 고황, 천종, 천료, 그 외 옆구리 아시혈 세 군데 자침이다. 각 뜸자리마다 뜸 다섯 장 시술. 이번에는 정 대표를 바로 눕히고 그녀의 복부를 망진, 촉진한다. 선명한 대장암 수술 자국이 드러난다. 죽음과 삶을 삼팔선처럼 갈라놓은 선명한 칼자국이 그녀가 겪어 온 참혹한 삶의 투쟁을 증언하고 있다. 이 몸을 하고 정 대표는 벌써 수년째 충무로의 대작들을 잉태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지병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의지에 고개가 숙여진다. 태충에 자침. 수분, 천추, 중완, 좌우양문, 거궐에 자침. 정해진 자리에 뜸 다섯 장. 치료가 끝나갈 무렵, 장진영 씨가 들어온다. 장진영 씨가 정 대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영화계의 선후배인 두 사람은 이제 같은 적을 상대로 싸우는 동지가 되었다. 장진영 씨의 배를 촉진하던 구당이 내 손을 자신이 촉진하던 지점에 갖다 대며 말한다. “봐라, 많이 잡히지 않았니?” “동계가 정말 작아졌어요.” “다 나았다니까.” 구당의 한마디에 장진영 씨는 누운 채로 뛸 듯이 기뻐한다.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희망할 것 없는 이 세상에, 희망할 수 있다는 게 말이다. 희망 너머에 그 무엇이 있든, 지금 희망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근거와 믿음이, 혹시 희망 그 자체는 아닐는지. 밝게 웃는 장진영 씨를 보며 생각한다. 치료가 시작된다. 태충에 자침. 양릉천, 거궐, 중완, 좌양문, 천추, 음교, 합곡, 동자료, 지창에 자침. 정해진 자리에 뜸 다섯 장. “형, 암은 왜 생기지?” “웬 뚱딴지같은 소리니?” 세브란스 전문의인 대학 선배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되물었다. 사실 요즘 나는 머리가 너무 무겁다. 죽음과 삶, 기자의 길, 나의 의지와 세상의 저항. 벌써 달수로 두 달째. 장진영 씨와 구당, 그리고 나. 이 세 사람은 매일 새벽 만나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묻고 또 묻게 된다.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에 무시로 손발에 땀이 차오른다. 아무리 생각을 굳게 먹어도 흔들린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선배가 입을 연다. “응, 암은 DNA 수준에서 결정되지. 암 인자는 모두에게 있다고 보면 돼. 어떤 이유로 생기는지 아마 수백 가지 이유가 가능할 거야.” “그러면 배우 장진영 씨에게는 왜 암이 생긴 걸까?” “참 힘든 얘기다.” “항암제를 먹으면 왜 속이 울렁거리지?” “그건 항암제가 정상 세포도 공격하기 때문이야. 항암제는 독약이라고 보면 돼. 장진영 씨가 위암 4기라면, 이미 전이가 상당히 진행됐다는 얘긴데. 그럼 항암제도 그에 맞는 수준으로 강력하게 투약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장진영 씨는 지치거나 속이 메스꺼운 게 없다고 하거든. 오히려 정상인처럼 산에도 자주 다니고, 밥도 잘 먹고.” “그래?" 선배가 되묻는다. "그건 자세히 몰라도 침뜸이 뭔가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이는 대목인데……. 사실 침과 뜸이 가지고 있는 통증 완화 효과는 이미 의학계에서도 상당히 평가를 받고 있어. 대중들이 모르고 실제 임상에서 널리 쓰이지 않고 있어서 그렇지.” “근데 형…… 환자들 머리카락은 왜 빠진대?” “그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이 분열과 대사를 많이 하니까, 항암제가 선택적으로 걔들한테도 작용해서 그런 거야.” “젊은 사람들의 암 전이 속도가 빠른 건 왜 그래?”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들을 마구 퍼부었다. “그건 아마 통계적인 얘기일 거야. 림프와 혈액을 통한 전이를 가설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위암 4기 환자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서울대병원이나 연세대병원에서 생존율이 5% 미만이라고 얘길 했다는데…….” “암은 잘라내는 게 제일 좋아. 항암제를 통해 암을 줄여 놓고 가능한 상황이 되면 잘라야지. 근데 4기 정도 되면 그걸 기대하기가 아주 난망해. 희망이 없다는 거지.” “구당 선생님께서는 암을 잡았다고 하시는데…….” 막힘없는 선배의 설명에 어느새 나의 목소리는 주눅들고 있었다. “암이라는 게 순간적으로 호전될 수도 있어. 암환자는 그 순간적 기쁨에 잠시 도취해 보기도 하지만, 시간이 가면 대개 다 죽어.” “그건 너무하지 않아, 형?” “상호야, 형이 조언 하나 할게." "네.. 말씀하세요." 마치 죄지은 아이처럼 나의 목소리가 숨어든다. "프로페셔널 전문의들은 암환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마음을 주지 않아. 나도 암환자들을 참 많이 겪었다. 이를테면 백혈병 환자가 들어오잖아. 30명이 들어온다, 그럼 대부분 다 죽어. 아주 운 좋은 경우가, 내가 알기에, 딱 한 사람 살았어. 골수이식 받아 가지고. 일일이 마음을 주면 힘들어서 환자를 볼 수가 없단다.” 철렁― 무너진다, 마음이. 필요 이상의 마음을 주지 말라고? 선배의 말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갈 사람은 어서 놔주라고 꾸짖는 것처럼 들렸다. 순간 나쁜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구당은 병원에서 포기한 장진영 씨측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만 침뜸을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오갈 데 없는 그녀를 내치는 것이 의료인의 자세인가? 다리에 힘이 풀린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구당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장진영 씨의 몸상태가 좋아져도 공은 병원에 돌아갈 것이다. 치료가 공개된 것이고 내가 취재기를 작성하고 있지만 암을 진단한 곳도 병원이고, 그녀가 좋아진 것도 병원이 진단할 사항이다. 병원은 자신들이 사용한 신약의 우수성을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결과가 좋지 않다면? 모든 걸 구당이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두렵다. 나 역시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지 모른다. 임상이란 대조군을 필요로 한다. 각종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 수백, 수천 명의 임상 결과를 모아야 비로소 의미 있는 의학적 논술이 가능하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물론 한 사람에 대한 임상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당은 그의 손과 눈, 그리고 코 외에 진단을 위한 기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제한된 환경에서 이뤄지는 제한된 임상이다.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 광야로 나가는 소년 다윗의 마음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세상이 나와 구당의 진정성을 알아주기만을 소망한다. 돈이 판치는 시대에, 들판의 쑥만으로도 병마와 맞설 수 있다는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 구당은 싸우고 있다. 나는 다만 그것을 기록할 뿐이다. 두려움 속에서 간절히.       잠시 유침을 해놓고 구당이 화장실로 향했다. 내 안에 맴돌던 고민을 장진영 씨에게 살짝 비쳤다. “진영 씨가 낫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지만 병원이나 세상은 침뜸이 아니라 항암제 때문에 나았다고 보겠지요?” “…….” “단 한 사람을 치료해 놓고 ‘봐라, 침뜸을 하면 이렇게 좋아진다’고 말하는 자체가 사실 난센스지요. 구당 선생은 어차피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아는걸요.” 장진영 씨가 내 말을 뿌리쳤다. 의외였다. “구당 선생은 70년 이상의 임상 경험을 가지고 있고, 저 또한 5년 동안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치료 사례를 확보해 왔지만, 통제 가능한 변수들에 의해 축적된 통계가 말하는 의료계에서 기존의 믿음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필시 엉터리로 취급받게 될 겁니다. 구당은 그렇게 많이 고쳐 놓고도 평생을 침쟁이라거나 돌팔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온 것이구요.” 나의 풀죽은 소리에 장진영 씨는 작정이라도 한 듯,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자, 이 기자님 잘 들어 보세요. 사실 제가 부끄러워서 얘길 안 했는데요, 항암제 치료하고 나서 제 입술이 얼마나 두껍게 텄는지 보셨지요? 약 먹고 나면 힘이 들어서 몸이 꺼지고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메스껍고 속이 울렁거려서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구요. 우울하고 희망이라는 게 전혀 없는 그런 날들이었어요.” 장진영 씨의 단호한 목소리 사이사이에 눈물 같은게 비쳤다. “그런데 침뜸을 한 바로 그날부터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입술이 다시 윤기 있고 부드러워졌고요, 밥도 잘 먹고 속도 좋고, 힘이 좋아져서 어제도 청계산엘 다녀왔어요. 두 시간 반 동안 산을 타도 아무렇지가 않아요. 제가 증언할게요. 침뜸을 무시하면 안 되죠. 세상을 상대로 저도 함께 싸울 거예요.” 장진영 씨의 말이 끝날 무렵 구당이 들어왔다. 혹시 구당은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까? 듣지 못했다 해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누가 지금 이 여인의 희망을 근거 없는 것이라 폄하하는가. 그녀는 자신만이 아니라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는 세상의 병자들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장진영 씨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는 숙명의 병상에서 일어나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다시 치료가 시작됐다. 장진영 씨를 돌려눕히고 곤륜에 자침. 위중, 신유, 비유, 신주, 흉추 4번 극돌기 하, 신도, 지양, 격유, 천료, 천종. 어느새 구당의 바쁜 손걸음은 자침을 마치고 있었다. 내 생각이 한자리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사이, 구당은 이미 환자의 고통을 어깨에 지고 저 멀리까지 걷고 있었다. 뜸자리마다 뜸 다섯 장 시술. 하루만큼의 힘겨운 치료가 이것으로 끝났다. <알려드려요> - '영리병원 반대'와 '민중의학 침뜸 보급' 위해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희망이 세상을 고친다>(나무와 숲)를 매일 연재합니다.   - <환자가 병원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 돈 들이지도 않고도 건강을 도모할 수 있는 침뜸의 소중한 진실, 함께 지켜주세요. 읽으시고 공감되시는 분, RT 부탁드립니다. - 장진영씨에 대한 치료는 2008년 9월28일부터 12월 25일까지 3개월간 매일 이뤄졌습니다. 연재 역시 2011년 9월28일부터 12월25일까지 이어집니다. - 우리의 오늘은, 3년전 장진영씨에게 그토록 절실했던 하루였답니다. 그녀와 구당의 대화를 통해, 당신의 하루가 더 근사해지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