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추워지기 시작하던 가을날 새벽 5시. 침뜸 임상취재를 위해 집을 나서야 할 시각이다. 하지만 오늘은 좀 망설여진다.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한 데다 조금 전 끝난 술자리 탓에 머리가 무겁다.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나온다. 최악이다. 하루만 쉬자고 할까? 구당에게 뭐라고 할까?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다. 순간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는 장진영 씨가 떠올랐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서둘러 침술원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 장진영 씨의 차가 도착해 있다. 지각이다. 내 자신이 실망스럽다.   치료가 시작됐다. 태충에 자침. 삼음교, 양릉천, 중완, 거궐에 자침. 치료를 지켜보는 눈꺼풀이 무겁다. 내내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 혹시 술 냄새가 날까? 머플러로 코와 입을 둘둘 말아 가렸다. 거울 속의 행색이 영락없이 탈레반이다. 치료가 계속된다. 좌양문, 우활육문, 수삼리에 이어 동자료, 음교에 자침이다. 정해진 자리에 뜸 각 다섯 장씩. 내가 죽은 듯 조용하니 구당이나 진영 씨도 역시 말이 없다. 새벽 적막 속에 구당이 나지막이 장진영 씨를 부른다. “진영아!” 묵묵히 침을 놓고 있던 구당. 장진영 씨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환자들 때문에 흘린 눈물이 진영이 때문에 마르는구나.” “호오, 그러세요?” 장진영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한다. “이거 봐라, 침이 얼마나 내 정신을 가져가는지 말이다. 사실 새벽이라 눈이 침침했거든. 그런데 지금 네게 침을 찌르니 침 자리를 보느라 눈이 맑아졌다. 눈물도 없어지고…….” “정말 정신이 통한다는 말이 맞나 보네요. 침으로 말이죠.” 장진영 씨가 며칠 전 구당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이제는 장진영 씨와 대화가 통한다. 반가움 때문인지 구당이 한층 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한다.   “진영아, 이제 너는 피를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단다. 자신이 없으면 얘기를 안 하겠지. 일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내겐 충분한 임상이 있단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강원도립병원장의 손녀딸이었다. 그때 손녀딸이 중학생인가 그 정도로 어렸는데, 악성빈혈이었지. 그런데 치료가 잘됐고 지금은 결혼을 해서, 언젠가 아이 둘을 데리고 인사를 왔더라고.”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두 번째는 인천에 사는 어느 약사의 동생이었다. 20대 청년이었지. 그 역시 지금은 건강하단다. 사례는 많다. 그런데 남자나 여자나 재생불량성빈혈 환자들의 공통점이 있는다. 혹시 그게 뭔지 아니?” “글쎄요. 뭐지요?” “그래.. 바로 편식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남자는 어느 순간 피를, 코피나 무슨 사고가 나서 피를 많이 흘리면서 그 증상이 생기게 된다. 반면 여자들은 보통 생리와 관련된 문제로 증상이 드러나지.” “어.. 사실 저두” “그래.. 코나 윗몸에서 피가 나는 대상월경이나 아예 안 나오는 무월경도 있지. 월경에는 20일형, 25일형, 30일형이 있는데, 알이 많을수록 20일형으로 가고, 더 일찍 시작해서 더 늦게까지 월경을 한단다. 72세까지 월경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 너 그거 아니? 우주는 알이란다, 알. 두 발로 걷는 짐승은 알을 낳고 네 발로 기는 짐승은 새끼를 낳는데, 사람도 처음에 뱃속에 있을 때는 알이었단다.” 장진영 씨의 말을 가로챈 구당의 재생불량성빈혈 강의가 잠시 삼천포로 빠지고 있을 무렵 뜬금없이 장진영 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할아버지, 저도 아이를 낳아 보고 싶어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는 젊은 여인이 무심결에 내뱉은 한마디. 그 한마디에 이른 새벽 공기가 칼에 베인 듯 무너져 내린다.   “할아버지, 저.. 정말 궁금해요. 진짜 경험해 보고 싶어요.” 술에 찌든 탈레반의 눈이 맵다. 돌아보니 아흔네 살 노인도 소리 없이 눈물을 찍어내고 있다. “그래, 문제없다. 너도 할 수 있다.” 구당이 장진영 씨의 어깨를 토닥인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보탰다. “어제 제 후배와 술을 마셨는데요, 그 친구 집사람이 서울대학병원 의사래요. 그런데 그 의사 선생이 같은 병원에서 암 진단 관련 일을 하는 동료 의사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뭔데요?” 장진영 씨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묻는다. “영화배우 장진영가 우리 병원에 다니는데 처음에는 상태가 되게 좋지 않았다더라. 그런데 그 암 진단을 한다는 의사 말이 병원에 올 때마다 진영 씨 상태가 무척 좋아지고 있는데, 알고 보니 뜸인가 뭔가를 몰래 하고 있다더라. 이런 얘기가 의사들 사이에 돌고 있대요.” “정말요?” 장진영 씨가 반색한다. “아, 그랬구나. 원래 2차 항암 치료 끝나고 CT만 하기로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좀 더 들여다 봐야겠다’면서 ‘내시경도 함께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랬나 보다.” 구당의 목소리도 덩달아 힘을 얻는다.   “여하튼 이제는 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침뜸은 하다가 막상 그쳐  보면 그 효능을 알게 된단다. 그러니 꾸준히 떠라.” “네..” “그런데 진영아, 너 백혈구가 뭔지 아니? 뜸을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만.” “글쎄요……” “진물 있지? 상처가 크면 클수록 진물도 많이 나오지. 그게 바로 백혈구란다.” “아…… 그래요?” “현대 의학이 대단한 것 같아도 사실은 내 몸 안에 있는 백혈구가 몸을 치료하는 것이란다. 어쩌면 인간이 장수하는 것은 일반 의학의 발달 때문이라기보다는 치과 의학의 발달이 가장 큰 이유일 게다. 치아를 건강하게 관리해 줌으로써 침도 잘 분비되고 저작 운동도 잘 해서 위가 부담이 없게 만들어 주는 거지. 인체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그러게요.” “중국 어느 성인가 평균수명이 가장 짧은 곳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무지하게 독한 고추를 먹는단다. 인체가 독성을 방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다 보니 위가 망가지고 그 결과 단명을 한다는 것이지.” “저도 그랬을까요? 저는 매운 거 많이 안 먹은 것 같은데.” “넌 피가 어려운 거다. 그런데 걱정 마라, 내가 많이 해본 거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안 나을 거라는 걱정은 안 한다. 다만 네가 계속 치료하지 않을까 봐 그게 걱정이다. 좋아지면 대부분 침뜸 치료를 그만 두거든.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늦는 경우가 많단다.” 뒤돌아 누운 장진영 씨에게 곤륜 자침. 위중, 신유, 비유, 신주, 흉추 4번 극돌기 하, 신도, 천종, 천료에 자침. 또 도도에 자침. 정해진 자리에 뜸 다섯 장씩. 치료를 마친 장진영 씨가 구당에게 조그마한 상자를 내민다. 열어 보니 이번엔 흰색 나비넥타이다. “구당 선생 코디네이터가 되기로 작정했냐”고 내가 농담을 건넸다. 구당은 이번에도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너, 내가 고맙다고 하면 좋아서 또 사주려고 하겠지?” “아니에요. 지난번에 드린 게 가지고 계신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좀 새로운 걸 골라 봤어요.” “진영아, 선물은 이르단다. 내가 원하는 선물은 네가 다 나아서 많은 사람들이 널 다시 영화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그게 내게 제일 큰 선물이란다. 나는 그 선물을 원한다.” 이 새벽에 벌써 두 번째다. 진영 씨와 함께 온 친구도, 매니저도 눈물 바람이다. 구당 연신 눈물을 찍어낸다. 거울속 탈레반도 눈이 벌게져 있다. 쑥 연기가 자욱한 좁은 방 안에서 한 여인을 둘러싸고 너댓이 둘러앉아 연신 훌쩍거린다. 새벽 공기에 퍼진 쑥 연기가 오늘따라 맵게 느껴진다.   분위기 전환은 늘 내 몫이다. 밖으로 뛰어나가 녹차 네 잔과 커피 한 잔을 타 왔다. 구당은 늘 커피다. 어떤 날은 열 잔 이상 마시기도 하는데, 주는 커피를 마다할 수 없어서.. 란다. 구당에게 어제 동대문체육관에서 열린 무료 침뜸 시술 대회에 대해 물었다. “그래, 한 2000명 정도를 기대하고 준비하지 않았겠니? 그런데 두 배 가까운 3500명이 몰려서 500명은 끝내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갔단다. 외국에서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온 분도 있었지. 침상 100개를 설치했는데 아주 장관이었단다.” 그러면서 구당은 어제 봉사현장에서 정치인 박모 씨 만난 얘기를 꺼냈다. “유명한 정치인 있지 않니? 박 아무개라고. 그런데 그 분이 내게 와서 정치인 조아무개가 아프니 그 사람 집으로 가자고 청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가 주변 사람들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환자들이 있는데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이냐’고, ‘치료는 정치인이라고 맘대로 받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침뜸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법 하나 만들어 준 적이 있냐’고 말이다. ‘어떻게 집에 가자는 말이 나오냐’고 내가 해줬다.” 듣고 있다 재미있어서 내가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얼굴이 벌개져서 도망치듯 사람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구나.” “하하하…….” 순간 모두 한바탕 웃어젖혔다. 구당은 화제를 바꿔 통일교 문선명 총재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다고 했다. 장소는 모레 가평. 구당에 따르면 문 총재는 ‘뜸이 한민족의 민중의술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녔으며, 앞으로 세계인에게 보급하기 위해 한민족이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다. 그렇다면 문 총재는 언제부터 뜸에 관심이 있었을까? 구당의 설명은 이랬다. “문 총재 그분의 누이가 있는데, 그분이 문 총재가 아주 어렸을 적 결혼을 했다고 해. 그런데 그만 폐결핵에 걸려 시집에서 쫓겨났다고 해. 그때가 문 총재가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지성으로 누이에게 뜸을 떠주었다고 해.” “참.. 착한 동생이네요.” 듣고 있던 진영 씨가 말을 보탰다. “덕분에 누이는 곧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대. 그때부터 뜸의 효과를 알게 된 문 총재는 늘 뜸이 잊혀지는 걸 안타까워했다고 해. 그래서 언젠가 뜸 보급을 위해 나서리라 내심 다짐을 했다고 하더구나. 그러던 차에 나를 알게 되었고, 이제 뜸 보급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났다면서 마치 일곱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겠니?”   문 총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가 우리와 똑같은 한민족·한국인이라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주말 기독교인에 불과하지만 교파적 이해를 떠나 문 총재의 뜸사랑이 인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담소를 마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 치료실을 나서려는데 구당이 마저 입을 연다.   “오늘 오후에 영등포경찰서에서 나오라는구나. 국회의원회관에 있는 뜸 봉사실을 한의사들이 고발했다고 해. 봉사하는 걸 못하게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죽기 전에 침뜸을 알리고 가고 싶은 것뿐인데 말이다. 참…….” 그간 1,000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이 국회 뜸 봉사실에서 무료 진료를 받았다는데, 과연 경찰이 그들에 대한 참고인 조사는 벌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잠잠했던 속이 다시 뒤집어진다. 출입처에 도착하면 중완과 족삼리에 뜸이라도 떠야겠다. 모두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진료실을 나섰다. 아직도 이른 아침이다.   <알려드려요> - '영리병원 반대'와 '민중의학 침뜸 보급' 위해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희망이 세상을 고친다>(나무와 숲)를 매일 연재합니다.   - <환자가 병원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 돈 들이지도 않고도 건강을 도모할 수 있는 침뜸의 소중한 진실, 함께 지켜주세요. 읽으시고 공감되시는 분, RT 부탁드립니다. - 장진영씨에 대한 치료는 2008년 9월28일부터 12월 25일까지 3개월간 매일 이뤄졌습니다. 연재 역시 2011년 9월28일부터 12월25일까지 이어집니다. - 우리의 오늘은, 3년전 장진영씨에게 그토록 절실했던 하루였답니다. 그녀와 구당의 대화를 통해, 당신의 하루가 더 근사해지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