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9일 월요일 침술원 앞에는 자기 순서를 배정받지 못한 환자 수십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하게 되면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예약을 우선적으로 독점하게 된다는 우려때문에 구당은 수십 년 동안 선착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침술원 부근은 밤샘 노숙을 하는 환자 가족들로 늘 붐빈다. 늦게 와서 순번을 받지 못한 환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침술원 근처를 배회하며 치료 기회를 엿본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새치기라도 할라치면 환자 가족들 사이의 말싸움이 금세 몸싸움으로 번진다. 동네 파출소는 아예 침술원을 중점 치안 관리 대상으로 점찍어 놓은 지 오래다.   순번을 받지 못한 환자와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다. 나는 저 아픈 사람들을 뚫고 장진영 씨를 치료실 안으로 안내해야 한다. 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더 많은 환자들에게 침뜸의 소박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침술원 뒤편 주차장에서 장진영 씨를 처음 만났다. 선글라스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장진영 씨임을 알 수 있었다. 당대 여배우의 포스가 몇 개 소품에 가려질 순 없었다. 돌아보니 부모님으로 보이는 노인 분들과 예당 최 부사장 등 회사 간부들이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인사는 잠시 뒤로 미뤘다. 장진영 씨와 간단한 눈인사만을 나누고 팔짱을 꼈다. 연인을 가장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장진영 씨 팔의 온기를 통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장진영 씨야 아프니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취재해야 할 기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자책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이 70%에 달하는 현실에서,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많은 병들을 침뜸과 같은 대안의료 수단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자가 알려야 할 중요한 사실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거쳐 장진영 씨를 2층의 구당 선생 사무실로 무사히 데려갈 수 있었다. 행여 장진영 씨에게 부담을 줄까, 구당은 오늘은 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다만 환자를 편하게 해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들어온 뒤 가족과 회사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들어왔다. 장진영 씨의 안색을 살피던 구당이 그녀를 진료대로 옮겨 복부 이곳저곳을 손으로 눌러 보며 이른바 촉진觸診을 시작한다. 아……, 한눈에도 복부가 부어올라 있다. 나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아니 벌써 복수가 가득 찼구나.’ 구당의 안색이 금세 어두워진다. 복수가 찼으니 회복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구당이 장진영 씨의 표정을 살피며 중완에 침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깊숙이 찔러 넣는다. 1치 6푼 호침(끝이 머리털같이 가는 침)의 침봉이 거의 끝까지 미끄러져 들어간다. 4센티미터 정도 들어갔을까? “어때요? 조금 뻐근한 게 아플 텐데…….” “네, 조금 뻐근해요.” “하지만 두고 봐요. 당장 오늘 밤이면 느낌이 달라질 테니…….” 중완에 자침해 놓고 조금 옆자리 피부 위에 쌀 반 알 크기, 그러니까 좁쌀 만한 크기로 뜸을 뜨기 시작한다. 쑥을 피부에 올려 두고 향불로 불을 붙인다. 첫날인 만큼 단 석 장에 그친다. 장진영 씨를 돌아눕게 한 구당은 이번엔 흉추 4번 극돌기 하 지점에 침을 놓는다. 이번에도 역시 침 자루만 남을 정도로 심자深刺(침을 몸의 깊은 곳까지 찌르는 것)한다. 구당은 전면(임맥 : 회음부에서 시작해 몸 앞쪽의 중심선을 따라 아랫입술 밑의 혈인 승장에 이르는 경락)과 후면(독맥 : 회음부에서 시작해 등의 척추 중앙선을 따라 위로 올라 목을 지나 머리 정수리를 넘어 윗잇몸의 중앙에 이르는 경맥)에 각각 한 대씩 침을 꽂는다. ‘정문일침頂門一鍼’이라더니 그럴까? 생명이 경각에 걸린 암환자에게 구당은 단 두 대의 침만으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상호야, 여길 봐라. 이 부위가 붕긋하게 부풀어 올라 있잖니?” 구당 선생의 손끝이 가리키는 흉추 3·4·5번 자리가 한눈에도 상당히 튀어 올라 있다. 통풍 환자나 당뇨 환자들의 경우, 대체로 이곳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책을 통해 알고 또 여러 번 직접 본 적도 있지만, 위암 환자도 이곳이 튀어나와 있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기의 흐름이 원활치 못해서 그런 거야.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잘 때도 여기가 결리고 자꾸 가슴을 쫙쫙 펴는 행동을 하게 되지.” 치료를 받던 장진영 씨는 그 와중에 뭐가 반가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답한다. “여기를 집중 공략할 거야. 여기에 이번 치료의 성패가 달려 있지.” 침이 꽂힌 흉추 4번 바로 옆에 뜸 석 장을 마찬가지로 좁쌀만 하게 말아서 뜬 구당은 위와 아래, 즉 신주와 신도에도 석 장씩 뜸을 뜬다. 그리고 신장을 자극하려는 듯, 신유에 천자淺刺(침을 얕게 찌르는 것)한 뒤 곧바로 발침拔鍼(침을 뽑는 것)한다. 첫 번째 치료가 끝났다. 치료를 지켜보던 장진영 씨의 아버지.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안색을 보니 그 역시 환자였다. 위가 좋지 않아 보인다. 자신을 ‘진영이 애비’라고 소개한 그는 구당 선생의 손을 잡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선생님,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딸입니다. 없어선 안 될 딸입니다. 꼭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를 마주하는 구당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한다. “뜸을 뜨면 좋아질 겁니다. 열심히 뜸을 뜨게 하십시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예당측 사람들도 한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입을 모은다. 분위기가 이런데도 장진영 씨의 표정은 암환자답지 않게 오히려 밝다. 막 첫 번째 항암 치료를 시작한 터라 이래저래 불편한 기색은 있지만 대범한 여성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회사와 부모님의 권유로 일단 침술원에 따라는 왔지만 모든 게 영 미덥지 않다는 눈치다. 구당과 장진영의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다 끼어들었다. 임상을 지켜보는 기록자로서 참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환자측의 부탁을 구당에게 전달해 공개 치료를 앞으로 진행할 사람이니 나 역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조금 인색하게 들리겠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장진영 씨로서는 침뜸의 치료 효과를 모르실 테니 침뜸 치료를 선택할지 여부에 대해 먼저 판단하실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충분히 심사숙고하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치료가 시작되면 구당 선생도 하루에 최소 한 시간씩 몇 개월을 시간 내주셔야 합니다. 오늘 보신 것처럼 문밖이나 건물 주변에 수십 명의 환자들이 계십시다. 대부분 병원에서 버림받은 말기 암환자들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구당 선생에게는 그분들이나 장진영 씨나 똑같은 환자일 뿐입니다. 구당 선생은 아무런 대가를 원치 않으시지만, 지금 문밖에서 치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저 많은 환자들을 위해 장진영 씨가 앞으로 받게 될 치료 내용을 공개하는 데 동의해 주셔야합니다. 침뜸 치료를 계속 받으실지 여부를 결정할 때 이 부분을 잘 고려해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진료실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장진영 씨 입장에서는 아직 치료 여부를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치료 내용을 공개하네 마네 하는 내 이야기가 부담스러울 게 뻔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치료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입장에 있다. 예당측 사람들이‘치료를 받게 되면 그렇게 하겠노라’며 부모님을 바라봤다. 부모님 역시 ‘그게 대수냐’는 듯 연신 고개를 끄떡였다. 장진영 씨만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다.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지금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장진영 씨 본인을 위해, 나아가 더 많은 암환자들과 침뜸을 모르고 고통받는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그녀가 소중한 치료 기회를 잡기를 진정으로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