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책 <희망이 세상을 고친다>를 읽으신 많은 독자분들 '소중한 진실이 묻혀서는 안된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고심 끝에 홈피 www.leesangho.com과 트위터 @leesanghoC를 통해 원문을 모두 공개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선물도 있습니다. 독후감 혹은 의견이 담긴 멘션을 보내주신 분들중 매일 한분을 선정해 <희망이 세상을 고친다> 한 권씩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랄게여. ^^)     2008년 9월 28일 일요일 인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빌어먹을 인생이라 한탄하다가도, 금세 자그마한 일로 웃음보가 터진다. 웃고 나면 왜 우울했는지 그 이유조차 잊게 된다. 본디 비극적으로 설계된 인생이지만 그래도 감사하게 만드는 삶의 신비 앞에서 인생의 희비극을 나누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흔들거리며 길을 걷다 보면, 매일 오는 것처럼 인생에도 석양이 내리고 아무런 해답도 찾지 못한 채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일개 고발 기자 주제에 인생 운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내 머릿속은 사흘 전 스포츠 신문에서 읽은 여배우 장진영 씨의 위암 발병 소식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십수 년째 현장 기자질을 하며 볼 것 안 볼 것 보고 지냈지만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위암 판정을 받고 돌연 연기를 중단한 그녀의 불운이 새삼스레 내 안의 허무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여배우와 암. 그것은 분명 충격적인 콘트라스트였다.   사실 장진영은 내게 다른 여배우들과는 격이 다른 배우였다. 인스턴트 배우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세태에 비추어 장진영은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몇 안 되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보여준 연기는 내게 긴 여운으로 남아 있던 터였다. 여성스러움과 귀여움이 공존하고, 도도함으로 성장盛裝한 도회풍의 여성상과 촌 동네의 싼 티까지 겸비한, 천상에서 영화를 위해 ‘툭’ 하고 떨어진 듯한 흔치 않은 존재감을 나는 그녀에게서 느껴 왔다. 아마도 배우 장진영에 대해 갖는 이런 느낌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그녀의 일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오늘 오후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예당엔터테인먼트의 최모 부사장에게 온 전화였다. 대한민국 유명 작곡가이자 사업가인 그와는 몇 해 전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되어 그간 연락을 나누며 지낸 사이였다. “이 기자, 장진영 씨 발병 소식 들었지?”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물었다. “그러게. 안 그래도 그 소식 때문에 마음이 무겁네.” “그렇구나. 장진영 씨 우리 회사 소속인 거 몰랐나?” “정말인가? 몰랐어. 장진영 씨가 예당 소속이었구나.” 설사 장진영 씨가 최 부사장 회사 소속인 걸 미리 알았더라도, 나와 장진영 씨 사이엔 별다른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연예나 영화 담당 기자도 아닐뿐더러 그녀는 하늘에서 빛나는 스타고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 형, 지금 언론에는 위암 초기라고 나가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그래서 이 형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전화했어.” “위암 초기라고 하던데? 그래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아니구나!” “그래, 말기야. 생존 확률이 넉넉하게 잡아도 5%가 안 된다고 해.”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5%도 되지 않는다고?’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인생은 비극임이 분명했다. “이 형이 구당 선생을 취재하면서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는데, 맞지? 구당 선생님을 좀 만나볼 수 없을까?” “글쎄, 그건…… 좀 곤란한데……. 구당 선생님이 뵙기 어려운 건 최 형도 잘 알잖아. 더구나 내가 환자를 소개할 순 없어.” “제발 딱 한 번이야. 이렇게 부탁할게. 이 형이 어떻게 좀 해봐. 꼭 살려야 해. 말이 되나, 저 나이에 말이야.” 한동안 눈물어린 호소가 이어졌다. 최 부사장의 평소 인간됨을 아는 나로서는 그가 장진영 씨를 단지 자신의 소속사 배우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 연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힘겹게 전화를 끊었지만 이내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예당의 다른 간부였다. 그 역시 기자 생활을 하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사람으로 내게 장진영 씨가 침뜸 치료를 받게 도와달라고 통사정했다. 고민 끝에 나는 최 부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한 가지 약속을 해주면 구당 선생에게 한번 얘기는 해볼게.” “뭐든 말만 하게. 돈이면 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게.” “내일모레 백세가 되실 분이 돈에 무슨 관심이 있겠어? 구당 선생은 침뜸을 알리는 데에 관심이 있어. 큰 병에 걸린 분께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혹 장진영 씨가 치료기를 공개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동의만 해주면 내가 한번 말씀드려 볼게.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고, 또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병이 나았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치료의 효능을 검증받을 기회도 없고. 자꾸 비과학적이라는 덫에 갇혀서 더 많은 사람이 알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막히는 게 너무 안타까운 거야.” “좋아. 물론 당사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찬성이야. 내가 본인과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볼 테니, 일단 구당 선생을 만나게 해주게나.”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보지.” 어수선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 담담히 전화를 끊었지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환자 상태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병원이 포기했다니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일 것이 분명하고, 한번 만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 구당에게 몇 달이나 되는 장기 치료 일정을 뽑아내기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일을 마치고 한걸음에 구당 선생을 찾아갔다.   참고로 나는 지난 2004년부터 우연한 기회에 구당 선생을 취재하면서 침뜸이야말로 돈을 들이지 않고 국민들이 건강을 지킬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 의료수단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2년간 직접 침뜸을 배워보기도 했고, 침뜸이 국민 건강을 위한 대체적 의료 수단으로 당당히 활용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검증과 연구가 이뤄지길 촉구하는 차원에서 취재 활동을 계속해 왔다. 통상 취재를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취재원들이다. 사람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듣자면 일단은 친해지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취재원을 만나면 나는 곧잘 친근하게 ‘형님’이라고 부른다. 이번에도 역시 ‘구당 선생’이라는 호칭이 어쩐지 불편했다. 그래서 과감히(?)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게 벌써 몇 년째다. “할아버지, 혹시 장진영이라는 여배우 아세요?” “장지녀이? 그게 누구니?” 구당 선생이 방그레 웃으며 묻는다. “장진영이라고 아주 유명한 여배우인데요. 글쎄, 암에 걸렸대요.” “그거 참 안됐구나.” 구당은 아픈 사람 이야기만 들으면 마치 자신이 환자라도 된 모양으로 금세 의기소침해진다.     “글쎄 위암 말기래요. 30대 초반인데 말이에요. 생존 확률이 5%가 채 안 된답니다. 어떡하지요?” 넌지시 구당을 쳐다봤다. “그러게. 어쩌니. 암에 걸리면 의사들은 그저 째고 떼어내고 마니까 제대로 치료하기가 쉽지 않지. 그나저나 무슨 암이라니?” “위암이래요.” “아이쿠, 위암이면 아주 고통스러울 텐데. 나중엔 못 먹어서 죽는다. 영양실조로 죽어. 침뜸을 하면 통증도 덜하고 먹는 것도 잘 먹을 수 있을 텐데…….” “그지요?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가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치료 과정을 공개하면 많은 사람들이 침뜸에 대해 알게 될 거구, 특히 위암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마 원치 않을 거야. 다들 치료를 해서 좀 나아지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잖니. 거기서 치료를 받다가 다시 안 좋아지면 찾아오는데 그때는 이미 늦어. 좀 나아지면 자기가 침뜸을 받았다고 남들에게 좀 얘기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러질 않잖니? 몸이 좋아지면 아팠던 얘기를 좀처럼 하기들 싫어하니까 말이다.” “아니에요. 제가 단단히 약속을 받을게요. 그리고 제가 직접 녹음도 하고 사진도 찍고 모든 과정을 기록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치료받은 사실이 없다는 얘기는 못할 거예요. 그대로 책을 내면 위암의 경우 어떻게 치료하면 환자가 편해지는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거구요. 제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기록할게요. 할아버지께서 시간을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이렇게 부탁한 적 한 번도 없잖아요?” “아니, 나야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지만, 너는 어떻게 매일 일하는 기자가 시간을 낼 수 있겠니? 아무리 짧아도 3개월, 어림해도 6개월은 치료해야 할 텐데.” “저도 할 수 있어요.” 말을 해놓고 나니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내가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구당 역시 흔들릴 것이다. 현장 취재기자가 6개월가량 매일 시간을 낸다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새벽에 치료가 이루어지더라도 동대문 침술원에 들러 한 시간가량 임상 취재를 하고 다시 그 내용을 정리하려면 왕복 소요 시간을 합쳐 최소한 서너 시간은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업무 성격상 거의 매일 술자리가 있고 늦어도 8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니까 방법은 잠을 줄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까지도 돈의 가치로 환산하고 마는 자본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실용적 대안이 침뜸이며, 아흔네 살의 구당 선생이 작고하시면 그나마 민중의술인 침뜸 보급 운동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 믿었기에 좌고우면할 여유가 없었다. “할아버지, 지난 몇 년간 제가 침뜸을 취재하면서 제일 아쉬웠던 것은 변변한 임상 기록이 없었다는 거예요. 물론 환자가 어떨 때는 어떤 처방을 통해 어떤 혈자리에 침뜸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식의 임상 예는 수도 없이 봐왔지만, 긴 시간을 두고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용태에 따라 그때그때 대응하는 치료 내용을 장기간 정리한 임상 예는 보지 못했거든요. 환자와 술자術者가 대화하며 병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해 남긴다면, 매우 가치 있는 정보가 될 것 같아요. 물론 한 사람의 환자를 통해 의미 있는 임상 기록을 만들어낼 수는 없겠지만, 첫걸음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침뜸이 좋은 걸 알면서도 의학계나 정부가 나서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하겠어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저라도 나서서 해야지요.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80년대부터 화상침을 개발해 가지고 임상에 쓰기 시작하면서 병원 의사들에게 그렇게 같이 공동 임상을 해보자고 제안을 해도 한 사람도 응하지 않더라. 그래서 94년에 영어로 논문을 써가지고 해외에 발표했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세상이 알아주지를 않아. 우리끼리라도 기록을 남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럼 허락하신 거지요? 약속하신 거지요? 그럼 제가 그쪽에도 임상 공개를 하는 쪽으로 약속을 받아 놓을게요.”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그나저나 환자 상태는 어떤가? 복수는 찼어?” “글쎄요. 아직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복수가 찼는지 여부를 나는 아직 물어 보지 못했다. 복수가 찼는지를 구당이 묻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복수가 찬 환자는 치료 경과가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받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모두 쉬 지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전체에 암이 퍼져 있다고 하네요.” “그야 환자가 치료를 받으려고만 하면 가능하지.” “문제는 아직 환자가 결심을 못했다고 하네요. 침뜸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침뜸에다 걸겠어요?” “그래, 우리 한번 해보자. 침뜸을 알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침뜸이 사라지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니.” 구당은 의외로 흔쾌히 공개 치료를 수락해 주었다. 물론 대가는 없다. 다만 그녀가 죽어 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침뜸 치료 사실을 떳떳이 밝히고 치료 내용을 알리는 데 동의만 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