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나를 억압했던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들이 아니면 자기성찰 없었을 것” 18일 출판기념회 성료 최한성 (marunnamu01@dailyseop.com)기자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찾던 희망이라고. 한평생 우리 시대의 우상과 치열하게 맞서온 그에 대한 최대의 찬사였다. 지난 50년 동안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논객으로서 잠들어있던 우리 민중을 깨우기 위해 달렸다.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 그리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서는 온갖 허구에 맞선 한 지성의 외침이자 그의 인생역정 그 자체다. 하지만 그의 주옥같은 저작들을 통해 비로소 생명을 얻은 시대정신을 차마 감당할 수 없었던 어둠의 세력들이 존재했다. 그는 이들과 결코 화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택한 것이 바로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1960년대 이후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이 겨레를 흔들어 깨운 죄로 무려 아홉 번 연행돼 다섯 번 구치소 신세를 졌다.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언론계와 학계에서 각각 두 번씩 쫓겨나는 아픔도 겪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자초한 불화의 영향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억압하면서 진실을 부정했던 이들을 너른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비록 그의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언제나 푸른 그의 정신은 어렵고도 힘든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는지도 모른다. 18일 저녁 ‘리영희 저작집의 출간을 기념하는 모임 - 고난을 무릅쓴 선생의 역정은 우리의 희망입니다’가 열린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이곳에 모인 약 200여명의 인사들은 이 시대의 등불인 리영희 선생의 포용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리는 지난 50년에 걸친 그의 연구와 집필을 공식적으로 마감하는 자리. 최근 리영희 선생은 언론을 통해 “한 개인에게는 무한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할 시기가 있는데 그 시간이 온 것 같다”고 전하면서 더 이상 연구와 집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그가 던져줄 사실상의 마지막 메시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그는 주어진 시간을 이용해 또다시 우리의 의식을 크게 흔드는 대신, 자신을 향해 온갖 고통을 선사해온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만일 나를 감시·비판하고 억압해 고통을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학문을 하면서 경거망동했을지 모릅니다.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하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나의 글이 위태로웠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리영희 선생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다해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나의 많은 벗들보다 더 강한 눈초리로 내가 자기비판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강조하면서 이날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의 일부를 미련없이 돌렸다. 이어서 그는 “그동안 많이 고생하면서 눈물도 흘렸다”며 “이제 한 사람의 인간 혹은 지식인으로서 이 사회에 대한 내 몫은 다한 것 같다”는 말로 우리 시대를 환하게 밝혀온 자신의 지적활동을 스스로 평가했다. 이 대목에서 리영희 선생은 지난 2000년 11월 찾아온 뇌출혈에 대해 언급한 뒤 “나이도 많고 뇌기능도 나빠졌다”며 “그래서 하늘이 ‘이제 세상에 말썽을 일으키는 글은 그만쓰라’는 의미로 불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내용의 명심보감 천명편을 인용하면서 “50년 동안 했으면 됐다. 그 이상 원하거나 하고자 하는 것은 과욕이다”라면서 모든 인간적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 같은 리영희 선생의 겸허한 뜻을 접한 이들은 가을 찬서리 같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에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랜 고난 끝에 그가 비로소 맞이하게 된 평안을 떠올리면서 아낌없는 축복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선생이 그동안 충분히 개발하지 못한 일면을 더 가꿔보겠다고 생각하는 데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며 “앞으로 공적인 발언은 안 하더라도 이따금씩 더 무르익은 지혜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리영희 선생은 한반도를 넘어 제3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우리의 혁명적 자산”이라며 “여전히 우리는 리영희라는 시대적 거장이 필요하고, 리영희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로 언제나 그가 건재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어지는 찬사에 대해 리영희 선생은 감격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과찬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러나 (찬사의 말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저 감사하다는 말씀만 드리겠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어진 순서에서 시민운동가 겸 방송진행자인 최광기 씨가 ‘함께 고생했던 부인 윤영자 여사에게 공개적으로 사랑고백을 해달라’고 요구하자 과거 힘들었던 시절을 소재로 농을 던지면서 행사장에 모인 이들을 큰소리로 웃게 만들었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알사탕을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워낙 가난해서 알사탕을 먹으면 버스를 못타고, 버스를 타면 알사탕을 먹을 수 없었어요. 결국 알사탕을 먹기는 했는데…. 그런 생활 끝에 오늘날 이정도 됐으면 남편 덕도 적지 않은 것이겠죠?” 이 말을 마친 뒤 리영희 선생은 혼인 50주년을 맞은 윤 여사와의 입맞춤을 통해 치열했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모두 접고, 또다른 인생의 시작을 알렸다. ⓒ 데일리서프라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