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빼앗기, 진실은 드러날 것인가 성균관 사상 첫 '족보위작' 감정 '온양정씨 족보위작 사건'의 끝이 보인다. 취재 개시 10년 만이다. 아직 재판이 막바지에 접어든 만큼 결론은 알 수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법원 판결 여하에 따라 향후 이 사건은 한국 사법사상 거대한 폭발력을 지닌 뇌관으로 자리하게 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뇌관의 폭발력은 법조 내 파장을 넘어 사회-문화적 연쇄 폭발로 이어질 것을 확신한다. '옳은 일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돈키호테라는 소리를 들으며 낯선 풍차와 맞서는 일이 잦았다. 때로 작은 부조리는 창끝에서 무너지기도 했다. 정말 세상이 바뀔지 모른다. 때로 기고만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였던가! 기존의 질서는 생각보다 견고했고, 세상의 벽은 높았다. 역사 발전은 필연이라지만, 고귀한 생명들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매정한 아버지와도 같았다. '온양정씨 족보위작 사건'이 그랬다. 옳은 일이라고 믿어 힘들여 밀어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증명하고 문제점을 보도해봐도 그때뿐이었다. 족보가 위작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명한 사안이었음에도, 진실 추구를 사명으로 하는 모든 기관들은 침묵했다. 아니 오히려 진실을 덮는데 급급했다고 말해야 맞다. 10년이 넘는 기간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과 사법부는 물론이고, 시청과 하급 관청에 이르기까지 입은 달랐지만 한목소리로 '절망의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진실은 힘있는 자들 만의 것'이라는 변주가 쉴새 없이 반복되었다. '온양정씨 족보위작 사건'에는 일제에 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후손들마저 뿔뿔이 흩어진 구한말 명문가, 온양정씨 일가의 비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종으로부터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은 정술교는 일제하 반일 애국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민영환의 정신적 스승이었으며, 유림들의 궐기를 촉구한 사표였고, 일제하 한민족을 한데 엮은 태극기 운동가였다. 그는 일제의 국권 찬탈 이후에도 항거를 계속하였고, 그 결과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후손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선조들의 봉제사조차 치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명문가의 명예와 막대한 분묘지를 노린 일파가 온양정씨 족보를 탐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0년간의 취재에 따르면, 현재 온양정씨 종중을 구성한 자들은, 일제하 혼란기를 틈타 위조된 호적을 토대로 온양정씨 족보에 몰래 끼어들어 온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은 종중의 이름으로 전국에 산재한 엄청난 규모의 온양정씨 분묘지를 야금야금 팔아 그릇된 잇속을 챙기기 시작한다. 천안시가 온양정씨 조상묘가 있는 쌍용동 일대를 택지개발을 이유로 매입하면서 120억원대의 토지보상금을 온양정씨 정랑공파(正郞公派)에게 지급한 것이 문제가 되면서 이 사건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놀라운 것은 이들은, 종중의 합법적 대표성을 주장하기 위해, 정술교 등 진짜 종손가로 이어지는 선조들의 묘소를 함부로 파헤치거나 무연고 묘소로 처리해 없애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돈을 위해 남의 애국지사 묘까지 버젓이 훼손한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동안의 취재과정을 거쳐 이 같은 내용을 수차례 낱낱이 고발하였음은 물론이다. 늘 그때뿐이었다. 경찰과 검찰이 서로 수사를 미루고 핑퐁질을 하는 사이, 담당 검사가 인사교체되고 나면 경찰은 무혐의 결정을 내리는 식이었다. 사건 수사는 범죄혐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언제나 결론은 무고와 무혐의, 그리고 시효경과 사이를 뻔질나게 오갔다. 어느덧 나는 '힘 있고 잘나가는 기관과 공직자의 입일수록 진실을 담지 못하더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족보는 알고 있다. 죽은자와 산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게 족보다. 그러나 아무도 족보의 진위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진실을 애써 회피하는 사람들. 본질은 없고 현상만 판치는 세상. 현상은 저마다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재구성되고 이해는 권력관계에 따라 배당된다. 그래서 시인은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절규했던가. 본질이 소외되고 현상만 판치다 보니 포르노의 음란한 내음이 세상에 가득하다. 전후좌우 맥락을 무시한 채 핏대 선 성기들의 탐닉만이 화면 전체에 가득하다. '온양정씨 족보위작 사건'은 한편의 포르노였다. 누가 진정한 종중이고 종손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소송의 본질임에도 당대의 고액 변호사들은 논의의 핵심을 잘도 비켜갔다. 족보의 위작 여부만 감정하면 간단히 해결될 사안이 십 년이 넘도록 다양한 새끼 소송들로 가치를 치며 암 덩이처럼 증식해갔다. 전문기관에 족보 위작 여부를 묻는 법원의 감정촉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딱 한 차례 애국지사 정술교의 숨겨진 종손의 요청을 법원이 인정한 적이 있다. 지난 96년 정신문화연구원은 법원의 촉탁을 받아들여 정밀 감정을 벌였고, '족보가 위작된 것으로 사료된다'는 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단지 '받아들이기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8월, 이 사건 재판부(대전지법 천안지원 민사합의 1부)가 이례적으로 족보 진위 여부의 재감정을 실시했다. 첫 감정 이후 10년만이다. 온양정씨 종중의 참된 종손이 누군지를 묻는 소송의 성격상, 족보의 진위를 캐지 않고서는 완전한 판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때문이었으리라. 이 결정에는 물론 재판부의 성실한 판단 노력이 있었고, 종손가의 열성적인 진실추구 노력과 종손 측 박찬 변호사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촉탁처로 이번엔 성균관을 지명했다. 감정 촉탁을 받은 성균관유도회총본부(회장 변온섭)는 감정단을 전격 구성,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성균관유도회총본부(이하 성균관) 측의 즉각적인 감정 수락은 무척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복잡한 집안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법원의 족보 감정 촉탁 수락을 기피해온 성균관이 적극적으로 본 사건 촉탁에 임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성균관이 감정과정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성균관은 이번 사건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온양정씨는 구한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망가'로서, '나라가 망하자 철저히 일제에 불복하는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3·1 만세운동 후 강제로 일제에 의해 거주지는 물론 조상의 분묘지인 선산까지 빼앗기고 가족들이 흩어진 가문'이기에 충의를 중시하는 성균관으로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균관은 족보 분석과정에서 현재의 종중이 진정한 후손들이 아님에도 거짓 후손 행세를 해온 것으로 확신했다. 성균관은 '대거로 온양정씨 족보에 끼어들어 온 자들은, 온양정씨 가문이 사실상 망하였다고 보고 남의 족보에 끼어드는 짓을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나아가 문제는 온양정씨 가문의 족보위작 사건이 단지 한 가문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라는데 있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성균관의 심각한 문제의식이 있다. 사회기강이 문란해진 일제치하를 거치며 족보위작이 만성적으로 자행됐고,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 사이 지금도 여전히 조상 바꿔치기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의 조상을 가로채는 것은 인륜에도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나아가 공동체 가치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행위다. 선산 등 남의 분묘지를 가로채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분묘를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다. 성균관은 이번 온양정씨 가문의 족보 감정을 통해 만연하고 있는 족보위작 실태를 고발하고, 나아가 족보와 호적 간의 비교는 물론, 분묘의 위치 확인 등을 종합한 족보 감정의 방법과 원칙도 제시하고 있다. 한 달 반여 동안 분석작업을 통해 성균관은 지난 9월 18일, 현재의 족보가 위작임을 밝히는 방대한 분량의 감정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감정결과를 정리하자면 대강 이렇다. 현재 종중을 구성하는 종원들은 대부분은 끼어들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70∼80대 고령이어서 자식을 낳은 수 없었던 사람 밑에 마치 친자손이 있었던 것처럼 거짓 작성하거나, 이미 죽은 사람에게 생전에 없었던 첩이 있었던 것처럼 위장해 그 밑으로 들어오는 등 각종 방법으로 족보에 끼어들어 왔다. 그 결과 대부분 끼어들어온 사람들의 호적은 족보의 내용과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호적과 비교해보니 상당수가 원호적의 기재 내용과 족보상 기재 내용이 달랐으며, 심지어 상당수는 성씨조차 '정'씨가 아닌 '길'씨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상당수가 위조된 족보에 기재되어 있는 분묘의 위치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종합적인 감정보고서를 받아든 재판부는 현재가지 석 달째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재판부가 이번에는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못내 궁금하다. 족보위작 판결이 이뤄지면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 예상되는 것은 사실이나, 진실은 그보다 소중한 것임이 분명하다. '옳은 일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책상 구석에 구겨버렸던 철 지난 믿음을 다시금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