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29일. ‘X파일’ 보도를 추진하며 생긴 갈등 탓에 사내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을 무렵이었다.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여야 국회의원이 주관한 ‘미-중-일 3국의 침구제도 관련 국제 심포지움’이 열렸다. 국내에서는 그 의미조차 생소한 ‘침구사’ 제도의 국제적 운영 현황을 짚어보기 위한 행사였는데, 그동안 숱한 의료관련 보도를 통해 국내 의료서비스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나로서는 이번 심포지움이 대단히 중요한 행사로 여겨졌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 알권리로서 국내에서 처음 열린 기념비적 행사였다. 확실히 그랬다. 이날 심포지움에서는 일본의 경우, 인구의 7% 이상이 고가의 한약을 지어 먹기 보다는, 단지 침과 뜸 만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한약을 지어 파는 한방의사 보다는 침의사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등의 사례가 발표됐다. 상황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침구학 연구를 통해 중국의 전통의학을 한단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꼭 값비싼 한약을 사먹지 않고도, 침과 뜸만으로 질병을 고칠 수 있다구?” 분명 의아해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황제내경』과 『난경』등 동양의학의 명저들이 일찌기 인정한 바이며, 나아가 WHO가 공인한 사실이고, 세상의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 사실이다. 그동안 유독 우리나라 국민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손이 있고, 그 손에 손을 얹고 있는 언론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중 아주 극소수는 알고 있다. 국회 의원회관에 설치된 침뜸 봉사실을 통해 침구치료를 받고 있는 대부분의 국회의원들과, 알음알음으로 침구치료를 받고 오랜 질병을 고친 재벌가의 측근들은 굳이 비싼 한약을 먹지 않고도, 단 몇자루 침과 한줌 뜸쑥만 있으면 오랜 병과 급한 통증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모른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일수록 더 모른다. 병명도 모른 채 그리하여 높은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오늘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랬어도 나는 침묵해야만 했다. 기자란 무엇이냐고 나를 괴롭히는 질문도 하루이틀 외면했어도 좋았다. 점잖은 언론들이 매양 그랬듯이 그저 모른척 넘어갔어야만 했다. 더욱이 나는 X파일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이미 MBC 조직원으로서 인격적 사망선고를 받은 몸이 아니었던가. 빈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고가의 최첨단 진료장비 도입이 의료계 뉴스 머릿기사를 장식하고, 한의원에서 까지 서구의 첨단 진단 장비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는 지금, 침 몇자루와 뜸 한줌 만으로도 대부분 질병이 고쳐질 수 있다고 외치는 것 만큼 무모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 다분히 비이성적이거나 심지어 사이비를 넘어서 주술적으로 까지 비춰질 수 있는 주장을 나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 수도 없이 반문하는 사이 나는 확신을 너머 행동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상업주의의 수준을 넘어서 아예 시장바닥으로 전락해버린 의료의 자본화 문제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한 것보다 더 중요한 기자의 사명이 또 무엇이랴. 부서진 몸으로라도 나는 외치기로 했다. “여기 침과 뜸 만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이 있다고..” 당시 취재 권한을 상실하고 라디오 편집부에 근무하던 나로서는 ‘국회 심포지엄’ 개최 사실을 보도국 의학전문 기자에게 ‘토스’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토스’란 언론사에서 정보나 자료 따위를 동료 기자에게 전하는 행위로 매우 평상적인 정보교류 활동의 일환이다. ‘취재 일정이 빠듯하다’는 의학기자를 대신해 국회에서 보도자료를 받아 ‘전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사측의 말대로라면, ‘업무영역을 침범’한 순간이었다. 내게는 고통의 터널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터널 속 터널.. 당시 나의 삶이 그랬다. 20초 짜리 단신이 6시30분 저녁뉴스에 나가자 보도국이 시끄러워졌다. 국민들이 '침구'의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을 두려워하며, 나아가 침구사 논의 자체를 자기 기득권 최대의 위협으로 여기는 한의협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의협은 단지 '국제 침구 심포지움'의 개최 사실을 알리는 MBC의 '2줄 짜리' 단신기사에 대해 마치 사생결단하듯 격렬하게 항의해왔다. 즉각 보도 경위파악이 이뤄졌고, 보도의 ‘배후’에 내가 있음이 드러났다. 그후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나는 감봉 1개월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태영의 '핸드백 로비사건’을 홈페이지에 고백한 죄로 감봉 3개월을 받은 뒤 7개월만의 일이었다. 아내가 걱정할까 얘기도 꺼내지 못한 징계 결과가, 도하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놈의 이상호 기자가 또 ‘문제’가 되었다고.. 신문들은 비아냥거렸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어차피'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던 나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사와 마주하게 된다. 대강의 기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한의협은 9월 29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MBC 자체 징계 결과 이상호 기자가 무면허 '불법자로 부터 로비를 받고 보도'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한의협은 “불법의료단체인 침구사단체의 집요한 '불법 로비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향후 침구사 부활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국민건강을 위해 강력히 대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이상호 기자가 불법단체의 불법로비를 받아 보도했다>는 것 아닌가! 기사의 출처를 보니 한의협의 ‘성명서’였다. 한의협 홈페이지에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떡’ 하니 초기화면에 성명서가 돌출되어 나온다. 억장이 무너졌다. 한의사라면 명색이 인술(仁術)을 행하는 의자(醫子)인데 어떻게 이렇듯 악의적 거짓말로 사람의 인격을 말살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막무가내식’ 압력 때문에 회사 징계위에 회부되었고, 그 결과 중징계를 받고 쓰러진 기자를, 이제 다시 몰려와 불법 로비를 받았다며 짓밟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확인 절차도 필요치 않았다. 골치 아픈 놈, 끝까지 짓밟아 명줄을 끊어 놓고 말겠다는 - 살기가 그들에게서 느껴졌다.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날들이 지났다. 회사 안팎의 의심스런 눈초리가 날 선 칼 끝 처럼 나를 찔러왔다. 인터넷을 떠도는 악의적 댓글들이 쓰라렸다. 친한 동료들 마저 노골적으로 내게 경멸을 퍼부었다. 사측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X파일의 진정성을 신뢰해주었던 얼마남지 않은 사내 동조세력까지 모조리 휩쓸려가고 말았다. 기자직에 대한 갈등은 물론, 삶에 대한 회의 마저 강하게 밀려왔다. 멍석말이... 당해 본적은 없다지만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말 곤장을 맞았다. 나름대로 저항해봤지만 그럴 수록 매가 추가됐다.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런 사이, 가을이 지나고 눈이 왔다. 겨울이었다. 차라리 좋았다. 거짓도 위선도, 위악도 모두 얼어버려라! 핸드백 사건에서 X파일 까지 일년, 어둠속의 날들이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났다. 내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세상엔 개나리가 피고 새싹이 움터왔다. 내 마음의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갔다.   불명예의 거미줄을 걷어내자. 봄을 맞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기자로서 다시 걷기 위해 나는 겨우내 방치해두었던 내 안의 상처들과 마주해야만 했다. 지난 15일, 한의협 회장과 홍보이사를 상대로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지난해말 한의협 앞으로 '성명서 정정'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아무런 조치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31일) 경찰서 철제 의자에 앉아 고소인 진술을 했다. 나는 단 줄의 기사를 위해서도 돈을 받지 않았다고. 피를 쏟는 마음으로 진술하였다. 목숨 같은 기사를 어찌 돈과 바꾸겠냐고, 결단코 불법로비를 받은 적이 없다고, 먼길 떠나며 신발끈 묶는 심정으로 또박또박 진술하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고소장 제출이 내게 또 어떤 터널의 시작이 될지 나는 정말 알지 못한다. 2만명에 달한다는 ‘메머드’ 한의협 조직이 벌써부터 강력한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는 얘기도 들린다.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비겁하게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로부터 도망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깊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을 마음 속 촛불 하나 켜들고 나는 간다. 신발끈 다시 묶었으니 먼길도 두렵지 않다. 봄볕 긴 날을 홀로 걸어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