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보도국 이보경 기자가 바라본 'X파일'에 대한 단상   'X파일' 보도 건을 계기로 MBC가 사방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먼저 아파트 값 폭등, 경기 침체 등으로 고단해진 민심이 그렇습니다. 극렬해지는 빈부격차 속에서 확인한 상층 부류들의 추악한 커넥션에 분노와 낙담이 교차하고 나면, 희대의 특종을 손에 쥐고도 주판알을 튕기며 머뭇거린 MBC라는 또 하나의 억압자에 대해서는 차라리 무관심이 합당한 대접인가 봅니다. '걔들이 그렇지 뭐. 뻔한 거 아냐?' 정도의 반응인 것 같습니다. 'X파일' 보도 이후 MBC에 대한 비난 증가 맨 위로 가 볼까요? 이 당, 저 당 삼성 돈을 먹은 것으로 나와 있는 정치권은 뜨거운 감자가 식기만 기다리는 형국입니다. 특검이다 특별법이다 부산한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제 자리를 맴돌면서 민심이 나가 떨어질 때까지 시간 죽이기에 여념이 없어 보입니다. 노인 분은 입원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정치 업계에서 억세게 운이 좋았던 한 사나이는 수사 반대다 뭐다 하면서 오지랖 넓은 물타기도 서슴지 않습니다. 돈 얘기는 껄끄러우니 도청 얘기꽃을 피우면서 말이죠. 검찰이야 일러 무삼하겠습니까. 어쩜 우리가 예견한 그들의 반응 시나리오에 그렇게나 충실한 배우들인 건지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하긴 삼성이 이런 일을 대비해서 오랜 세월 전 방위적으로 깔아 놓은 돈이 몇 조라느니 하는 풍문이고 보면 쓰디쓴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이제 언론계가 있습니다. 조중동으로 불려지는 기득권 언론들은 어떻습니까? 이건희 회장이라는 태양의 '나와바리'에 감히 범접하려한 이카루스의 날개는 녹아야 하고 추락해야 마땅하다는 뾰족한 손가락질이 보입니다. 그들의 입김이 전만 같지는 못하다는 게 시대의 변화가 가져다 준 소중한 의미라면 의미겠지요. 지난한 세월, 그래도 민주화에 동승하려고 노력해 온 MBC의 소중한 벗들 중 일부에게서 전해지는 싸늘한 눈길은 가장 가슴이 아픕니다. 물론 변함 없이 MBC보다 더 힘차게, 진심으로 이 의제를 끌어당기고 있는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같은 매체들 그리고 참여연대와 민언련 등 시민단체들에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로 헌사를 대신하겠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주변의 싸늘한 눈길 하지만 어떡합니까, 제가 아는 한 공영 MBC의 보도 역량은 아직은 이만큼인데. 이만큼 하기에도 헐떡거렸습니다. 이상호 기자 손에 그 자료가 쥐어진 게 거저가 아닙니다. MBC 구성원들이 무노무임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돼 버틴 90년대 초 52일 간의 파업, 오직 민중의 여망에 충실할 뿐 한 점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카메라출동' 같은 좋은 프로그램들, 부패 무능 사장들 퇴진 투쟁, 지속적으로 냉전 수구 타파를 위해 흘린 땀 등이 그 밑에 다 깔려 있습니다. 마침내 언론비평이라는 영역을 뚫었고, 이상호 기자는 사명만큼이나 부담이 큰 그 영역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해 귀중한 특종 거리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취재원이 "보도할 자신 있느냐"고 물은 대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민완 기자 이상호는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 후 MBC가 제대로 보도를 못하고 우왕좌왕, 눈치 보기, 소심함으로 시간을 허비한 건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한 바탕 회오리가 몰아친 지금 사내외의 뜻 있는 사람들 일부는 남은 테이프를 왜 안 트느냐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는 게 불법이니 하는 오종종한 얘기를 제가 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 국면에서 MBC가 19꼭지씩 내보내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그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 때 '에라 모르겠다'하고 저질러 버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회한은 많은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보도의 부담을 결국 혼자 감당 못했듯이, 거사의 부담은 버거워 보입니다.   최문순 사장이 아닌 MBC 기자들이 책임질 일 이미 다 나온 내용이라 해도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튼다면 국민적 공분을 감정적으로 한 번 더 자극하는 효과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음험한 대화의 당사자들에게는 더 큰 수치심과 더 큰 복수심을 심어줄 것입니다. 이 모든 걸 고려해서, 그래도 최문순 사장이 결단을 내려 보도국에 틀라고 지시해야 할까요? 최문순 사장이 직접 나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최선의 방책일까요? 우리가 그토록 목쉬게 갈구했던 절차적 민주주의를 저당 잡혀야 할 정도로 MBC 보도 책임자들이 우스운 사람들일까요? 최 사장은 기자 출신의 경영자가 됐습니다. 기자 사회가 할 일은 기자들이 결정하고 실행하고 책임질 일 아닌가요? MBC가 끝을 보기 힘들어 하는 이유 중에는 스스로 놓은 일종의 덫도 있습니다. 처음 이상호 기자가 의미부여한 X파일 보도의 효과는 "자본의 심장에 도덕의 창을 꽂는" 것입니다. 지금 진도는 같은 비유로 치면 창을 심장 부근 가슴에 조금 꽂아 피를 흘리게 한 정도겠지요. 만일 비유가 이랬으면 어땠을까요? '자본의 검은 심장에 도덕을 수혈하는', 또는 '오만한 자본에 도덕을 담금질하는', '자본의 쉰 내 나는 겨드랑이에 도덕의 날개를 다는' 등등 말입니다. 애초 비유대로라면 치명상을 입어야 하는 자본이 이런 비유 안에서는 훌륭하게 거듭납니다. "자본의 심장에 도덕을 수혈할 수 있는 날까지 연대해야" 번지수가 한참 다른 얘기라서 웃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지금 사형제도 폐지가 국제적인 대세인데, 자본은 너무 사악했으니까 그 심장에 창을 꽂을 거라고 먼저 말한다구요? 자본은 여전히 사악한 만큼 웃었겠지요. 그리고 대비했겠지요. 씨름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씨름이라고 해도 열심히 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겨야 하고 이기고 싶다는 열망은 여러분 모두와 MBC 기자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기자촌의 우물가인 미디어오늘에 와서 호소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합시다. 자본의 심장에 도덕을 수혈하고 자본의 겨드랑이에 도덕의 날개를 다는 그 날까지. (이보경 / MBC 보도국 라디오뉴스부 차장, '미디어오늘'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