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오늘은 상호생각이 아니라 상호'마음'을 이곳에 살짝 내려 놓습니다.) 새벽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제는 잠을 좀 자야할텐데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낯선 세상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일에 대한 설레임 때문이아니다. 반복되는 긴장과 상습적인 스트레스.. 이번에도 나는 누군가의 비리를 캐기 위해 지독한 위험 속으로 스미어 들어가야만 한다. 이번엔 그래서 특별히 가발과 분장도구 까지 챙겼다.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이 땅의 날씨 탓일 것이다. 날씨.. 그래 가을이다. 문득 사방을 둘러본다. 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한때 우린 소리죽여 '혁명'을 이야기 하던 때가 있었다. 엄혹한 감시가운데서도 '새로움'이나 '내일' 따위의 말들을 (이젠 비루하고 낡아버린 말들이지만) 입 밖으로 되뇌이면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행복해오던 시절이 있었다. 캠퍼스의 봄을 함께 했던 친구들. 몇몇은 죽고, 대부분은 삶의 한가운데로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농성현장에 돌맹이 처럼 나뒹굴던 우리들 사이로 회계서적과 법전을 들고 분주히 비켜가던 친구들은 이제 회계사와 법관이 되었다. 모두가 돌아간 민주광장. 전날 등사한 유인물이 여기저기 버려진 그 곳에 갈곳 몰라 방황하고 있는 나를 본다. 찟겨진 깃발을 어쩌지 못하고 아직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는 정말 인생의 지진아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 보고 또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스로 낯설어지도록 채찍질해야하는 숙명. 그 숙명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 밤, 나는 어느새 서푼짜리 신파의 엑스트라가 되어 하릴없이 걷고만 있는건 아닌지. 올 가을도 내 입가를 떠나지 않는 시가 있다. 박재삼 선생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벌써 십수년의 가을을 이 시와 함께 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겠네. 올해도 다시 가을이다. 길거리의 은행잎을 주워든다. 낙엽을 줍던 소녀들과 그 소녀들 너머로 짐짓 진지한 척 미소를 짓던 대학시절의 나를 본다. 돌이켜 그려보면 지난 날들의 풍경 마다엔 해질녘 노을이 짙게 내려앉아있다. 기억해야할 사람과 추억해야할 약속들.. 당시는 몰랐거나 지금은 잊어진 온갖 소중한 것들이 문득문득 풍경 속에서 피어오른다. 그리곤 내게 돌아오라고 노을빛 손짓을 흔든다.   나이가 들면 그래서 시인은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나보다. 노구의 박재삼 시인이 새록새록 정겹다. 그러구보면 난 참 다행이다. 시인이 아니라서.. 조금만 눈물 짓고 조금만 마음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