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미국내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미국연수기' 업데가 늦었습니다. 전편에서 이어지는 두번째 글입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원로 여류화가 천경자씨의 둘째딸 김정희씨였다. 그녀는 천경자 여사의 이른바 '미인도' 위작사건을 뒤쫓아온 내게 매우 소중한 취재원이었다. 김정희씨는 어머니 천경자씨의 뒤를 이어 화가생활을 하며 조지타운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치고 있는 남편 문범강씨와 함께 자신도 인근 대학에서 그림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 김정희씨는 91년 '미인도' 위작시비가 불거졌을 당시 부터 어머니를 도와 위작의혹을 강력히 제기해왔다. 물론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위작설의 진실을 취재하기 위해 나서는 기자도 제대로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부독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90년대 초는, 언론도 권력의 모습을 닳아있었던 시절이었다.   결국 언론에 대한 정정요구와 취재요청은 끝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후, 그녀를 포함한 천경자씨측은 언론에 대한 깊은 불신 탓인지 그동안 좀처럼 '과거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아왔다.      그런 그녀가 내게 전화를 해온 것이다. 물론 취재에 협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마음을 바꾼데는 두 사람의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한사람은 문제의 '미인도'를 바로 자신이 그렸다고 우리에게 털어 놓은 권모씨다. 그의 고백과 모작 경위는 이번 취재가 마무리 되는 대로 방송을 통해 보도해 드릴 예정이다.   다른 한 사람은 가수 조영남씨다. 스무살 위의 천경자 화백과 친누나 처럼 친했다는 그는 미인도 위작사건을 보며 자신 또한 화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깊은 회의에 빠졌다고 한다. 작가가 그리지 않았다는 데도 당신이 그린 것이 맞다고 강변하는 이땅의 풍토. 그런 풍토에서도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이땅의 화가들. 나의 취재사실을 알게된 조영남씨는 전폭적으로 취재를 도와주었다. 미국에 있는 천경자씨 측과 다리를 놓아준 것도 바로 그 였다.              김정희씨를 만난 건 뉘엿뉘엿 해질 무렵, 워싱턴 디시 외곽의 한국식당에서 였다.   중년의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천경자 여사가 소녀적부터 '미도파'라고 부른 둘째딸이 바로 그녀였다. 천경자씨의 그림 속 모델이 될 정도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결국 그림을 포기하지 못하고 뒤늦게 그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현재 워싱턴의 한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로서 또한 같은 화가로서 그녀가 겪은 충격 역시 대단했다. 오랜 침묵의 깊이 만큼이나 그녀는 당시 사건에 대한 많은 자료를 모아두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도 알아보지 못하고 반 미치광이로 낙인찍혀 고국을 버려야만 했던 어머니의 한.. 그녀는 그것을 고스란히 그녀 가슴에 담고 있었다. 아프지만 다행스런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공개한 자료들중에는 충격적인 것들도 있었는데, 이 또한 보도를 통해 소상히 전해드릴 예정이다.   작품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몇 개월을 매만져온 어머니. 방바닥에 펼쳐놓은 물감을 손가락으로 녹이느라 손 끝이 마를 날이 없던 어머니. 외출에서 돌아오면 그리던 그림 하나하나와 대화를 나누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였기에 자신의 그림 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작가로 낙인 찍은 한국 사회가 너무도 야속했다. 그녀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천경자 여사의 지난 날들을 되짚어 걷다 보니 그녀와 나.. 둘의 눈가엔 회한 위안의 눈물이 발그레 퍼져가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만난 연수팀 일행들. 시차 때문에 조금은 지쳐있던 그들과 함께 워싱턴 디씨의 외곽, 버지니아의 한 중국식당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호텔로 돌아와 하나둘 모인 곳은 언론재단 천세익 연수팀장의 방이었다. 이번 연수를 자신의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기획했다는 언론재단 천세익 연수팀장은 이번 여행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연수를 참여한 각각 기자들의 마음도 한가지였다. 뜻하지 않은 즉석 토론회가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한국적 탐사보도의 전형을 세울 것인가.' 거창한 토론은 밤늦게 까지 계속됐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시차가 주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졸기시작했다. 앞으로 펼쳐질 3주간의 연수과정에 대한 부담과 기대를 나눠 가지고 돌아온 호텔방. 어찌된 일인지 졸음은 걷히고, 깊은 밤 객사의 불은 쉬 꺼지지 않았다.   조-중-동이라 이름 붙힌 언론사 선후배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요언론사를 대표해 참여한 기자들. 나는 3주 동안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탐사보도야 말로 갈라진 언론계의 개혁과 생존을 위한 방편임을 공감하리라. 나아가 미국의 탐사언론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적 '탐사기자협회' 발족의 단초가 모색해봐야 할 것이다. 잠시 뒤 떠오를 태양을 맞기 위해 눈을 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