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 도착했다. 몇 곳의 미국 도시를 여행했지만 이 곳은 처음이다. 비행기에서 본 땅의 모습부터 모조리 녹색이다. 내려와서 보니 정말 널직한 초지에 군데군데 띄엄띄엄 집들이 박혀있다. 빌딩들도 하와이의 무희들 마냥 저마다 허리아래를 숲으로 치장하고 있다. 올때마다 매양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의 주거환경은 그들의 부를 지탱하기 위해 희생되고 있는 주변부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 너무도 비교된다. 하지만 이번 워싱턴에서 느낀 위화감은 미국내 다른 도시들에서 느낀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미국의 수도를 너머 전세계의 정치적 중심으로 통하는 이곳 워싱턴 디시는 그 내부로 들어갈수록 더 큰 이질감을 내게 심어주었다.   포토맥 강을 중심으로 오른쪽 연안에 자리잡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백악관에서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넓직한 길과 길 양쪽에 들어서 있는 관청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위상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시 입구에서 왕궁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는 주작대로. 그 위에서 눈을 씻고 있었을 한반도의 나그네가 천년의 시간을 넘어 측은하게만 느껴진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 바로 이곳에서 자본주의 사회 세계 정치질서가 구동되고 있는 것이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건물 마다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과거 거석문화의 잔재로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건물들. 물론 이탈리아 밀라노의 거대한 중앙역이 보여주는 파시즘적인 건물이 주는 정서와는 달랐다. 오히려 거대하면서도 잘 정돈된 건물의 배치와 건물들 사이의 엄청난 여유가 나에겐 더 큰 권위로 다가왔다. 분명 이 건축과 배치를 떠받쳐주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미국의 건국정신과 당대의 정치철학이었을 것이다.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내내 건물들 마다 벽에 조각된 글들을 읽어보았다. 평화나 평등.. 그들이 충실하려 했던 민주사회의 이념이 눈에 띈다. 원주민을 압살하고 세운 자신들만의 민주주의였지만.. 순간.. 드문드문 보이는 미사여구들 사이로, 중동의 먼 나라 이라크의 참상이 피어오른다. 기념관의 벽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세기던 그 손으로 옥중의 이라크 민중을 욕보이고 무고한 어린이들의 머리위로 폭탄을 투하한다. 그나마 이 나라를 유지해온 절대 가치들이 무너지고 있다. 거대한 이 도시를 어찌할 것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든다. 놀란 마음에 사방을 돌아보니 어디서 본 듯 했던 이 도시가 바로 로마의 현시였음을 깨닫는다. 10여년 전, 천정 없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며 걸었던 로마 시내. 콜로세움과 원로원, 공동 목욕탕을 지나며 느꼈던 권력의 무상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로마를 건설한 과거의 사람은 단 한사람도 로마에 살아있지 않다. 죽음의 로마를 애도하는 것인가, 레이건의 죽음에 맞춰 건물 마다 내걸린 조기가 6월의 미풍에 가볍게 펄럭인다.   잠시 차창 너머로 멍청히 눈만 껌뻑거리던 나.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에서 사전에 섭외해둔 취재원과의 인터뷰 때문에 함께 간 일행들로부터 빠져나와야 했다. (주: 앞으로 3주 간의 미국 취재여행의 뒷얘기를 이곳에 올립니다. 촉박한 일정상 본격적인 취재를 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시차와 여독으로 인해 설익은 객수가 담긴 잡문이 될 것입니다. 참작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