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벌써 5년전 이야깁니다. 아래 글은, 그러니까, 제가 대검찰청을 출입하던 지난 99년 여름이었지요, YS 아들 김현철의 사면 직후 개인적으로 써둔 글입니다. 다시 보니 역시 새롭네요. 얼마전에도 대통령 사면권에 대한 논란이 다시 한번 일었습니다만, 이제 '제 4심'이라는 '특별사면'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재개되야 할 것입니다. 조만간 <신강균의 사실은>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시 다뤄볼까 하는데요. 이에대한, 고발가족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이번엔 며칠이나 갈 것 같아?" 경기은행 사건발표 직후 '축소' 의혹이 제기되자 검찰 관계자가 기자에게 건넨 말입니다. 여론의 추이에 민감한 행정부처에서 껄끄러운 대국민 발표를 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굴려보는 계산법인데요. 그래서인지 국민적 저항이 예상되는 미묘한(?) 발표의 경우 대개 신문이 나오지 않는 주말을 의식해 금요일에 행해지는 게 관례 아닌 관례가 돼버렸습니다. 금요일 발표가 있으면 토요일 조간에 한번만 푸닥거리를 당하고 나면 망각의 강인 일요일을 지나 자연스럽게 여론의 집중포화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기은행 수사발표가 있던 지난 7월 30일 금요일에는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의 파업유도 사건 수사발표까지 겹쳐 금요일을 '전세 놓고' 써야 하는 검찰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현철 씨의 사면 여부가 관심이 됐던 이번 8.15 특사발표 직전에도 법무부 관계자는 여론의 예상 반응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갈 것으로 보나?" "상황이 다르다. 파문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다." 법조출입 기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법무부의 사면발표는 8월 13일 역시 '금요일'에 이뤄졌습니다. <특별사면, 특정한 자에 대한 감형과 복권은 대통령이 행한다> 지난 48년 법률 제2호로 제정된 '사면법' 9조의 내용입니다. 모두 27조로 이뤄진 이 법률에서 어찌 보면 '사면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면권자'에 대한 규정은 오직 단 한 줄 '대통령이 행한다'는 말 외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보적 법조인들은 대통령의 사면권에 구체적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법무장관이 특별사면 등에 대해 '대통령에게 상신한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제하의 장관이 '상신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행정부 내에서 이뤄지는 '요식행위'일 뿐, 그 전권은 대통령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밖에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고는 있지만 이 또한 시기와 논의 내용은 대통령 자신이 정할 뿐더러 그야말로 '특정한 자'에 대한 사면 여부는 대통령 본인의 결정 사안일 뿐 '의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결국 현행법 아래서는 혼자서 '행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일인자로서 무한한 권한을 누림과 동시에 그에 따른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책임감도 함께 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8.15 특별사면을 앞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적 관심은 대통령의 한마디에 쏠렸습니다. 이미 지난 3.1절 특사에서도 현철 씨의 사면 여부가 논란이 됐던 만큼 이번 경우는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과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를 사면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 취임이래 단일 결정사안에 대해 이토록 국민적 '관심'이 고조된 적도 없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이번 사면 결정처럼 정권의 윤리성에 대한 국민적 '감시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던 적도 없었습니다. 유종근 지사 사건과 고급옷 로비사건, 경기은행 수사와 내각제 백지화 선언 등 숱한 의혹을 경험한 국민에게 이번 사면결정은 현 정부가 국민에게 스스로 '담보' 잡힌 정권적 '윤리성'에 대한 심판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천심'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알성시에서 '試題'로 내려진 '사면'을 끝내 '정치논리'로 풀어냈습니다. "과연 정답이었을까요?" 결과는 매우 비관적입니다. '試驗官'되기를 자임한 언론은 일제히 '오답'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방송도 '제한적'으로나마 시민의 목소리를 통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현철 씨 사면이 확정된 8월 12일자 뉴스에서 MBC와 KBS가 각 톱블럭 3꼭지 중 시민반응으로 1꼭지, 8월 13일자에서는 법무부 발표 꼭지 일부를 할애해 '사면의 부당성'에 관한 여론을 전했습니다. 국민적 저항을 의식한 청와대가 가만있지는 않았습니다. 군색하지만 나름대로 대응논리를 내놨는데요. 대표적인 논리가 현철 씨에 대한 사면이 <부분사면>이었으니 이해해달라는 얘깁니다. <부분사면>이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집니다. 첫 번째로 벌금과 추징금은 면제하지 않은 채 잔형집행만을 면제해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잔형과 함께 재산형까지 면제해준 사례는 지금껏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만일 잔형과 함께 벌금이나 추징금을 모두 사면해준다면 심각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유사한 범죄로 이미 돈 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잔행집행 면제 사면은 돈을 낸 사람에 대해 이뤄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면제해줄 수 없는 것을 면제해주지 않은 채 "부분적으로 사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형선고 실효사면' 처럼 확정판결의 효력을 전부 없애는 <완전사면>이 아니니 <부분사면>이라는 주장인데요. 이 주장도 말이 안 되는 억지 주장입니다. 왜냐면 '형선고 실효사면' 역시 현철 씨처럼 실형이 이미 선고된 사람에 대해서는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형선고를 실효'시켜주는 경우는 선고를 유예 받았던 사람이나 형의 집행을 유예 받은 사람에 대해 이뤄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인 만큼 왈가왈부할 게 못되지만…" 청와대의 사면결정이 내려지자 법원과 검찰은 실망을 넘어 할 말을 잃은 표정입니다. 모두들 '점잖으신 분'들이라 이렇게 말머리를 꺼내놓고서도 가슴 한쪽에는 숨길 수 없는 '배신감'이 감지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조세포탈 혐의'를 처음으로 적용시켜 현철 씨에 대한 사법처리에 성공(?)한 검찰의 사기가 추락한 것도 문제지만 누구보다 그에게 실형을 선고한 법원의 반발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사법부가 정치쇼의 조연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자신의 사면방침을 미리 알고서는 형집행을 위한 소환에 응하지 않고 벌금이나 추징금도 내지 않은 현철 씨를 풀어준다면 "과연 누구를 감옥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는 자괴적인 목소리도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사법제도는 4심제다"라는 또 다른 판사의 항변은 판사들 사이에 "이유 있다"는 공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기왕 현철 씨를 사면하려면 신창원을 먼저 풀어달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8월 12일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의 말마따나 현철 씨 사면 이면에 '김영삼 前대통령의 요청'이 있었다면 '신창원은 아버지가 없냐'는 말도 나옵니다. 한술 더 떠 박대변인은 '현철 씨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당시 사회분위기가 국정농단을 가능케 한 점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창원의 장기 도주를 가능하게 한 것도 사회분위기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국민적 물음에 대해 청와대는 또 다시 어떤 군색한 변명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결국 이런 청와대의 허술한 논리와 변명 이면에는 알려진 대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前대통령 사이에 있었다는 모종의 '약속'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휘호 여사와 손명순 여사 사이의 눈물로 통한 '모정'이 결정적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다가오는 총선을 의식해 더이상 늦출 수 없는 사면의 '사연'이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계산대로 "이번 현철 씨 사면이 정국을 풀어나가는데 제역할(?)을 발휘할 것이냐"도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리한' 사면에도 불구하고 상도동측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되려 속타는 쪽은 청와대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만일 내밀한 거래가 있었다면 표정관리가 필수적이겠지만요. 또, 정권의 계산대로라면 일정시점이 지나고 이번 사면의 '비윤리성'을 국민들이 잊어줘야 할 텐데요. 그게 의문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회의 파행과 정치권의 이전투구, 또 계속될 각종 의혹사건의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의 활동으로 제도정치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퇴로를 찾지 못한 국민적 실망은 '정권의 균열'을 찾아 압박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라 스스로 이름지은 현정권인 만큼 정권의 균열은 의외로 '윤리성의 붕괴'에서 올 가능성이 큽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의 압력도 더욱 커질 테니까요. 이 같은 위기의식은 현철 씨 사면이 확정되던 당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제기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론에 맞서 사면을 강행할 경우, 정권의 기반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의 고언(?)입니다. 황 수석의 고언이 현실로 이어질까요.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 지도 미지숩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또하나의 심판일을 향해 굽이쳐 흐르고 있습니다. 사면한 자의 사면이 국민의 사면을 받을 수 있을 지, 사면(四面)에 '노래'가 넘쳐납니다. (1999.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