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제도, 이제는 재검토해야! <91년 미8군 용산기지 발보니 극장앞 카투사 사망사건의 진실> 지난 91년경의 일입니다. 저는 카투사(KATUSA) 병으로 8군 본부중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거리지만 잊혀지지 않는 동기가 한 사람 있습니다. 용산기지에 함께 근무했던 그는 키는 작은 편이고 말수도 적었지만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지난 10여년 동안 품어온 제 마음속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용산기지 안에는 직업군인인 미군들을 위한 다양한 소비시설이 있었습니다. 피자집과 레스토랑, 극장, 심지어 파친코와 나이트클럽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10달러도 되지않는 월급으로 한달을 버텨야하는 카투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전방에서 고생하는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느껴야하는 미안함도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었지만 마치 낯선 부잣집에서 머슴살이하는 듯한 카투사병들의 박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습니다. 식민지 점령군 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미군들의 태도와 한국에 대한 무시는 의례 제대를 앞둔 카투사들을 반미의 '화신'으로 키워내곤 했습니다. 그 당시 카투사 시험을 치룬 사람들은 '군부독재의 사병(私兵)'으로 전방에 내몰리기 보다는 차라리 '미제의 용병'이 되겠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습니다. 똑같이 2년여를 썩을 바에야 틈틈이 자기 실력이라도 쌓자는 안온한 판단이었죠. 하지만 막사 휴게실에서 김치냄새가 난다며 거만하게구는 미군 사병들과 맞서 싸움이라도 벌일라치면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때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늦게 동료 미군의 방에 따라들어가는 이땅의 누이들을 지켜봐야하는 일도 참을 수 없는 경험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럴때면 입대전 읽었던 김남주 시인의 시집을 펼쳐보는 일이 잦았지요. 그러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용산미군 기지 한가운데 발보니라는 미국 전쟁영웅의 이름을 딴 극장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발보니 씨어터. 그런데 바로 그 극장 앞에서 사람좋은 제 동기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극장 앞으로 달려나가보니 이미 구급차가 그를 싣고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합니다. 한동안 극장 앞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망연했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망연함 너머로 1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왜 죽었을까. 정작 카투사 인사과는 별 말이 없었습니다. 한국인 극장 종사자들과 당시 목격자들을 상대로 당시 사건의 정황을 알아봤습니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제 가슴은 다시 한번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는 영화를 보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왜 줄을 서냐구요? 거기에는 작지만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미군들은 모두 직업군인이라서 비록 이등병이라도 적지 않은 월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카투사들은 그렇지 않죠. 피엑스 하나 달랑 있는 전방부대에서도 월급 만원은 작은 돈이겠지만, 달러로 환산해 10불이 채 안되는 한국군 월급은 부자동네 용산에서는 그야말로 코끼리 비스켓이었습니다. 미군동료들과 함께 하는 각종 행사에 돈이 없어 뻘쭘하게 한쪽 구석에 방치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미군 하사관이 '시혜'의 손짓이라도 보내오는 날이면, 문득 50년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받아 먹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내게서 발견하고는 유전하는 역사의 모진 굴레를 확인해야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도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볼 돈이 없으니 미군의 자리잡기가 끝나 잉여좌석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미군들이 빛나는 달라를 내고 들통 만한 팝콘 그릇을 끼고 극장안에 유유히 들어서는 동안, 카투사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씁씁하게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부대찌개에 넣을 햄쪼가리를 얻기 위해 식사시간이면 메스홀(미군식당) 근처를 서성이던 식당 할머니의 눈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달러하는 영화요금을 내지못해 줄을 서야하는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겁니다. 그럴거면 차라리 영화를 보지 않으면 되지않냐구요? 옳은 얘깁니다. 하지만 뛰어봤자 벼룩이지. 알량한 자존심을 대피시킬 수 있는 공간은 미군부대 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영화상영 직전 극장 뒷좌석에 자리가 몇개 비면 극장측은 그제사 카투사 대열에 손가락 신호를 보냅니다.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의 이야깁니다. 인기있는 영화의 경우 막판까지 기다렸다 그냥 돌아가야하는 경우도 종종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죽은 날도 미군 손님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입장 순서가 됐는데 줄이 자기 앞에서 끊긴게 화근이었습니다. 친구는 이제껏 기다린 점을 이야기하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국인 극장 매니저에게 사정을 했나봅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 매니저는 아예 그런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마치 거지를 대하듯 눈살을 찌뿌리지. 제 동기는 자신을 버텨내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진 겁니다. 식민지 반도의 청년으로 점령군 미군의 용병이 되어 하루하루 지탱하던 존재의 기둥이 흔들려버린 겁니다.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게 당연한데도 말길을 못알아듣는다고 미개인, 저능아 취급을 하던 아름다운 나라 군대 상관의 다그침도 순간 잊어버렸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저는 그 친구를 생각해왔습니다. 아니 어쩌면 한시도 잊어본 일이 없을 겁니다. 그다지 친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왠지 애처로와보였던 그의 행색이 저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10여년전 군대생활 도중 죽어간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생각이 오래 머무르다보니 세월은 제게 작은 깨달음을 주더군요.   오죽하면 죽었을까. 오죽 마음의 상처가 컸으면 죽었을까. 오죽 분했으면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땅위에 스러져 다시 깨어나지 않을까. 이제 저는 압니다. 죽은 것이 그 혼자 만이 아니었던게지요. 그와 함께 저도 죽었던 겁니다. 저의 민족적 자존심도 그 친구와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강고한 소비의 타성과 자본의 틀에 얽매어 스스로를 보지 못한 사이, 오랜시간 그와 나란히 누워있던 내 자존심의 주검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날 발보니 극장 앞에 쓰러진 것은 분단된 나라에서 태어나 미국이 선사한 굴욕의 역사를 거부하는 이땅 모든 젊은이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른뒤. 이제 그들의 친구들과 동생들이 차디찬 발보니 씨어터 바닥에서 꺾인 허리를 펴고 다리를 세워 일어나 맥도널드 햄버거와 나이키의 방파재를 넘어 광화문 미대사관을 집어삼킬 촛불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사는가 봅니다. 오늘은 크리스 마스 이브. 죽은 자만이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기독교의 종교원리가 너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소파개정 투쟁과 미국 바로보기 운동을 목격하며 이제 저는 비로서 비운에 죽어간 제 동기의 진혼을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전세계 유래가 없다는 카투사 제도. 어찌보면 50년 넘게 이어온 굴곡된 한국사의 상처입니다. 남의 나라 미국의 군대를 위해 종속된 한국인 병사들. 전통가요 노랫말 속의 '카츄샤'와 혼동되어 불리는 그들의 이름이 '카투사(KATUSA)'인 이유는 그들이 미군에 'Augmented(보충된)' 'Augmentor'(사람 대신 위험한 일을 하는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해방이후 적어도 수십만이 카투사의 이름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 흔한 예비역 중앙회나 전우회니 하는 단체가 없는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한때 나마 '미국의 용병'이 아니었는가 하는 자책과 민족적 자존심의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탓일 겁니다. 카투사는 촛불의 바다 앞에서 미국 대사관을 지켜야하는 운명을 지닌 전경요원들 만큼이나 슬픈 우리시대의 현주소입니다. 이제 카투사제도의 존폐나 개선을 위한 성숙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징집된 사병들과 노예적 보수, 낙후된 개인화기에 의존해온 우리나라 방위전략도 전면 수정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는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만이 미국하고도 샌프란시스코주 용산구 발보니 씨어터 앞에서 이름없이 숨져간 고인의 명목을 비는 길일 것입니다. 언제쯤 그를 위한 진혼곡을 부를 수 있을까요. 그날까지 저는 그의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기억은 칼보다 강합니다. 기억은 잊지 않으려 싸워 얻는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면 바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