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지난 시간 나를 버텨준 것은 몰핀이었어... 몰핀. '비장미'라는 이름의 고급스런 몰핀. '전씨 일가의 비자금을 찾아라' 제3편 <살아있는 권력 전두환>을 방송하고 나자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왔다. 그중엔 나의 신상을 걱정해주는 전화도 적지 않았다. 아직도 서슬퍼런 독재자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수구세력과 또 어깨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리라.. 수사정보 기관에 있는 한 친구는 전두환 측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포착되었다고 했다. 밤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뒤를 돌아보라며 조언해주었다. 그런가하면 나의 제보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도 걸려왔다. 전씨 측에서 아무래도 자신의 존재를 파악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씨측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마치 눈두덩을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같다. 멍하다. 망연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또 겁도 난다. 순간 우울해지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기도 한다. 순간 기억속의 검은 그림자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4-5년전의 일이니까..<시사매거진 2580> 때던가, <카메라출동> 때였던가? 어둠속의 검은 그림자 서너명으로부터 흠씬 두드려 맞은 적이 있다. 그들은 줄곧 나를 뒤따라온 것이었다. 나는 이틀 동안.. 무력감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밤늦게 잘 아는 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실명을 이야기하자. 가수 조영남씨다. 그의 말에 나는 가장 높은 말 값을 메겨주고 있다.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실 영남이 형도 나의 보도를 보고 걱정이 되더란다. 그는 내게 대뜸 " 말콤 X를 좋아하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형은 '화개장터'나 '딜라일라'를 노래하듯 너무도 태연히 '말콤 X'를 꺼내든 것이다. 순간 놀라웠다. 사실 나는 내 생각에도 확실히 마틴 루터 킹 보다는 말콤 X 쪽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말콤 X의 일대기를 다시 펴보았다. 바로 이 대목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또 하루를 빌렸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이슬람 민족'의 일원에게, 또는 어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아니면 그들에게 고용된 무지한 흑인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매일 하루의 목숨을 빌리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나는 백인들이 나를 적대시하고 격렬하게 비난할 때마다 내가 미국의 흑인들을 위해 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만일 내가 미국이라는 몸에서 '인종차별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도려내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죽을 수 있다면, 미약하나마 진리의 빛을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때 모든 공로는 알라에게 돌려져야 하고,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말콤 X) 나는 분명 그의 신념에 진한 동의를 보내고 있었다. 빨간색 플러스 펜의 자욱이 나와 말콤 X 사이를 흐른 시간 만큼 이나 깊게 번져있었다. 수차례 살해위협과 실제 테러를 거쳐 용케도 살아왔던 말콤 X. 그는 결국 자신이 예견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느 누구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뻔한 인생을 하루라도 더 살아남겠다고 애쓰며 산다. 살겠다고 발악을 하며 죽어가는 사람과 담담히 걸어가는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인가? 분명한 것은, 말로는 모두 삶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은 모두 세포적 단위의 수명연장에만 관심이 있는 듯 하다. 고발기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 못할 고통을 의미한다. 어디 한번 찾아보시라. 이 홈피 안 어느 곳에도 나의 가족사진은 없다. 나 이외 테러의 표적을 스스로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이유 때문이다. 또한 가급적 나의 사적 관계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것. 하지만 방송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하는 이상 유일한 방어마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 주변사람들이라도 챙겨야한다. 그들을 위한 유일한 방법 역시 그들에 대해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것 뿐이다.   돌이켜 보면, 기자질을 해온 지난 10년 동안을 하루처럼 극도의 긴장감 속에 숨을 죽이며 걸어왔다. 지난 97년 보도국 사회부 시절,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총연맹을 집중 고발한 적이 있었다. 수구우익의 본산이었던 자유총연맹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줄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할 것이다. 그들을 고발하는 행위는 사실상 죽음을 자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은 적중했다. 그들은 나를 규탄하는 집회를 대규모로 조직했으며, 또 자유총연맹의 기관지 기자라고 하는 사내 몇명을 보내 끊임없이 내 뒤를 미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밤길 '소심증'은 카메라출동 시절, 그러니까 99년을 거치면서 더욱 증세가 심해졌다. 정치권과 정치인들에 대한 고발기사를 쓰게되면서 이상한 전화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밤길을 걸을 때, 이른바 '고발기자식 보행법'을 익힌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고발기자식 보행법은 우선, 사방을 경계하며 특히 뒤를 자주 돌아본다. 항시 주머니엔 두툼한 핸드폰을 쥐고 있다. 미지의 공격범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코너를 돌거나 엘리베이터를 탈때는 상대를 먼저 제압하기 위해 몸을 구석에 두고 기민하게 움직일 것을 상상해본다. 특히 밤에 한적한 곳에 세워둔 차에 오를 때는 뒷자리에 누가 타있는지 차에 무엇이 부착돼 있지는 않은지를 살핀다. 주행중엔 백미러로 후방차량을 자주 살핀다. 규격 외 소포나 우편물을 직접 열지 않는다. 이 뿐이 아니다. 초면임에도 과도하게 친절한 사람은 위험하다. 그 사람이 여자면 더 주의한다. 누군가 내게 넣어보낸 자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말 전두환씨 일가의 비자금 취재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정보관계자들로부터도 위험하다,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은 기억이 갑자기 새롭다. "미스터 리.. 그들은 우리도 조심한다. 스나이퍼(자객)는 어느 곳에서든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해라." 이러고도 제 정신으로 사냐구? 글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얼마전 정신과의사 정혜신 박사에게 내 정신상태의 진단을 의뢰한 적이 있다. 정상이란다. 위협이 없는데도 그러면 '피해망상'이지만, 나의 경우 위협이 실재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 박사는 '왜 그렇게 사냐며 삶의 방식을 바꿔볼 것'을 내게 조심스럽게 '권고'해주었다. 위협 속에서도 정상적으로 살고자 하는 나의 노력. 그 노력을 위해 나는 밤마다 칵테일을 마신다. 눈물 혹은 피로에 젖은 독한 술에 '비장미'라는 몰핀을 한방울 떨어뜨려 마시는 칵테일. 그래.. 나는 비장미의 칵테일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슬프고도 장한.. 그래서 너무도 아름다운 비장미.. 이 비장미는 어느새 이상호식 미학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나의 삶의 형식이 내 미학적 취향까지 바꿔버린 것인가. 아니면 나의 미학적 취향이 내 기자적 삶의 형식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뒤죽박죽 피투성이가 된 채, 나의 20대는 저물었고 30대도 기울어 간다. 어느새 나는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의 와타나베 켄을 공감하는 중년으로 달음박질 치고 있는 것이다. 살기 위해 매일 죽어야하는 사무라이의 역설.. 죽는 날까지 매일 살아가는 아니 연명해가는 또 다른 현실 보다는 진정한 것은 아닐까? 지난 2000년 여름. 소송이 몰려 들어오고 살해위협까지 기승을 부리던 그 때. 당시 살인죄로 복역하고 나온 한 사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가 고발한 한 업주가 그에게 나를 해코지 하도록 부탁해둔 모양이었다. 피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야만 했다. 나는 후배에게 내가 한시간 내에 건물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 하도록 부탁했다. 사내를 찾아 들어가던 약속 장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절의 햇볕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찬란했다. 그것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기자로 사는 삶. 삶의 아름다움을 쫓다보니 하고 있는 일이 고발기자질이다. 그리하여 두려움에 떠는 이 고발기자는, 오늘도 '비장미' 풍기는 독주를 마셔야한다. 깊은 밤, 홀로 이렇게. '차라리 올테면 어서나 오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