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오늘은 지난 99년 9월 2월, 제가 대검찰청을 출입하며 취재노트에 작성해둔 글을 하나 올립니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한 글인데요, 요즘 읽어봐도 전혀 낯설지가 않네요. 그만큼 대통령 주변정리는 중요한 일이고, 언론의 중요한 사명이겠지요. 이번주 부터 새로 시작되는 프로그램 <사실은> 때문에 경황이 없어, 연일 터지는 주요사안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네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생각들을 좀 나눠주시면 어떨까요?) 1. 이야기 하나,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 지난달 29일(99년 8월 29일)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두환 前 대통령과 골프 회동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신당 창당 정국에 묘한 기류가 가세되고 있습니다. 여론의 주된 관심은 '국민회의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TK세력과 손을 잡을 것인가'하는 쪽에 쏠려 있습니다. 여론이 분산된 사이, 오늘 조간신문에는 골프회동을 전하는 작은 기사가 눈에 띄더군요. 하지만 이 기사는 대중의 주목을 못받고 여론의 관심으로부터 휫파람을 불며 유유히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슨 기사냐구요? 기사의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 한편, 골프가 끝난 뒤 클럽하우스에서 이어진 점심식사 자리에는 이 골프장이 속한 금호그룹의 박정구 회장과 박삼구 아시아나 항공 사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많고 많은 골프장 중에 하필이면 금호그룹에 속한 아시아나 CC에서 라운딩이 이뤄졌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대해 전두환 씨 측은 "함께 라운드한 김준성 前 부총리가 골프장을 정해 초청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둘러댄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금호그룹 박정구 형제와 김중권 비서실장, 전두환 前 대통령 등 7명이 함께 한 점심식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요? 이에 대해 언론은 단 한줄도 기사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호남의 인사가 식사를 하며 지역감정을 타파하자는 '고담'이 오갔다는 믿지 못할 풍문만 들리네요. 문제는 김중권 실장의 가벼운 운신에 있습니다. 평상시라면 전직 대통령을 만나 정치적 조율을 하든 협상을 하든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골프장을 이용하고 식사를 함께 한 금호 박정구 형제는 이미 금융감독위원회를 통해 '주식거래를 통해 1백억 원이 넘는 부당이득을 취한 것'으로 발표된 사람들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금호산업과 금호건설의 합병과정에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5백만 주에 달하는 주식을 사들여 125억 원의 차익을 챙겼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날 식사에 참석한 두 명 외에도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을 포함해 금호 4형제가 모두 연루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날 식사를 함께 한 박정구 회장 등 두 명의 관심사는 청와대 실세를 자신들의 골프장에 모시고 향후 검찰수사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자는 데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신동아그룹에 대한 검찰수사 과정에서 보여진 것처럼 사법처리를 앞둔 재벌가의 로비는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공중전, 지상전, 수중전… 가능한 수준의 모든 작전이 입체적으로 이뤄집니다.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사법처리에 대한 1보를 날리며 수사 상황을 보도해온 MBC로서는 재벌의 무차별적인 로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집에 회사 직원들이 진을 치는가 하면, 해당 기자에게 인사상의 불이익이 미치도록 윗선에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기사에 대해 수십억대의 소송을 제기한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선후배나 정치권 인사 등을 통한 로비에도 전력을 투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 신문에는 광고를 미끼로 접근해 수월한 결과를 얻어냈지만, '공영'인 MBC의 경우 광고나 술대접의 유혹도 잘 먹히지 않았습니다. 오리려, MBC 법조팀의 1진인 윤도한 차장은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신동아 직원들에게 생맥주를 사주며 '위로'하느라 쌈지 돈이 털렸다고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습니다. 골프장 식사모임이 있고 다음날 금융감독위원회는 이들 금호그룹 4형제를 서울지검에 고발하게 됩니다. 사건은 현재 서울지검 특수1부로 배당돼 기초조사가 진행중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이들 금호 4형제에 대한 소환조사, 또 소환조사에 이은 사법처리가 이뤄질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의 창문'이라는 김중권 실장은 범죄혐의가 드러났고, 다음날이면 형사 피의자가 될 재벌총수를 만나 '로비의 표적'이 됐다는 의혹을 씻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창문'이 창문의 역할인 투명성을 그만큼 상실한 순간입니다. 2. 이야기 둘, 박주선 법무비서관 지난달 31일 동아일보는 1면 톱으로 "세풍 관련 야당의원 10여 명을 곧 사법처리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습니다. 취재원이 기사신뢰도에 직결되는 검찰기사의 특성상, 자연히 관심은 '발설자가 누구인지'에 쏠렸고, 역시 이번에도 기사의 배후에는 청와대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있었습니다. 박 비서관과 기자들의 대홥니다. "세풍사건을 종결하겠다는 것인가?" "한나라당에 야당 탄압이라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세풍사건을 매듭짓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검찰에 전했다. 한번 검토하라고 했다." "여당이 수사에 개입하는 거 아닌가?" "개입하는 게 아니다. 내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런 여론이 있다는 것이지. 지시한 게 아니다." '그런 여론이 있다'고 전달했을 뿐, '지시한 게 아니다'는 말의 순수성을 그대로 믿기는 힘듭니다. 취재 결과, 세풍사건 종결에 대한 논의는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언급된 사실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말이 좋아 비서관의 '의견 전달'이지 사실상 그 같은 의견을 전달받는 검찰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지시'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결국, 박주선 법무비서관의 공개적인 발언은 대통령이 '검찰의 특정사건 수사에 개입해 구체적으로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무너뜨린 것으로 이해됩니다. 국정운영을 위해 법무장관을 통한 '포괄적 지휘'만을 허용하고 있는 이유도 검찰권의 중립적인 행사를 위한 제도적 장치 아닙니까? 그런데 박주선 비서관은 이런 의견개진이 '자신의 입장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이 같은 청와대측의 '의견개진'이 있은 뒤 대검찰청은 일단 '수사는 정치논리를 배제한다'고 말하면서도 '언젠가는 마무리해야 할 사안이 아니냐'며 윗선(?)의 뜻을 수긍한다는 눈칩니다. 오늘(9/2) 오전 신승남 대검차장과 기자들 사이의 이야깁니다. "박 비서관의 전달내용은 사실상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나온 것 아닌가?" "그렇다고 봐야지." "검찰수사는 어떻게 되나?" "정치권이 수사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언젠가는 마무리한다고 말해오지 않았냐. 세풍은 수사 착수 1년 전후로 마무리할 방침이었다." "한나라당이 이승구 대검 중수1과장을 찍어 비난하는 성명이 나왔는데…?" "정당의 논평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것 아닌가. 신경 안 쓴다." "이승구 과장에게 조기 종결 독촉은 하는가?" "오래 전부터 독촉했다. 이 과장이 판단할 사안이다." 입으로는 '실무검사가 판단할 사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청와대의 의중이 전달된 이상 우리의 검찰이 '그 뜻'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결국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한마디가 나름대로 세풍사건의 본질을 캐내려고 애써온 검찰 수사에 남은 신뢰마저 송두리째 무너뜨린 결과로 이어졌다고 보여집니다. 청와대가 중지하라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수사였다면 '표적사정'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사실상 동조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음을 비서관은 알고 있었을까요? 3. 대통령의 이상한 사람들 취재의 관심사가 검찰에 집중된 만큼, 40명에 달하는 비서관들과 관련된 이상한(?) 행보를 두루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비서관들을 둘러싸고 이는 잡음과 의혹은 우려를 넘어 언젠가 이곳 대검찰청의 사건으로까지 비화될 조짐마저 감지되고 있습니다. 원활한 정국운영을 위해 벌이는 대통령 참모들의 통상적 업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관행'이라고 눈감아 넘기기에는 개혁을 주도해야 할 그들 스스로의 위치가 평범하지 않습니다. 일단 사회문제가 되고서야 승냥이떼처럼 몰려다니는 언론의 행태도 더이상 시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변의 사소한 '관행'부터 문제삼아 개선하는 언론의 태도가 결국은 사회개혁의 소명에 부응하는 길일 것입니다. 지난 대전법조 비리 사건으로 법조계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온 전별금제를 청산하기까지 언론은 반세기를 넘게 침묵해왔습니다. 눈으로 보고서도 머리로 알고서도 입으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관행이었이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대통령을 둘러친 '인의 장막'이 아닌 투명하게 국정을 볼 수 있는 '창문'이 될 수 있도록 창문 닦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그 책임에서 결코 언론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