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가 나가자 당장 법원측으로 부터 항의가 들어왔다. "족보 전문가가 뭐라고 하든 판결은 판사가 한다."는 것이다. 종중측에서도 "남의 집안 문제에 끼어 등지 말라."는 타박뿐 어느 누구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1년 뒤. 족보변조 여부를 놓고 벌어진 할머니와 문중의 재판은 결국 문중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결과는 참담했다.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낙담하지도 않았다. 대신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족보로 안 되면 호적으로 문제를 삼겠다는 것이다. 즉 문중 대표들이 족보에 끼어 들어오려면 당연히 호적도 변조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할머니는 오래 전에 떼어둔 문중 대표들의 호적서류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의 예감은 적중했다. 문중 대표자들의 부모나 그 자신들의 호적에 하나같이 문제가 있었다. 이를테면 실제로 부자관계인데 호적에는 양자관계로, 실제로는 친엄마인데 호적엔 계모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남의 호적에 끼어들어온 것이 사실이라는 판단을 한 할머니는 천안지원에 그들의 호적을 말소시켜줄 것을 신청했다. 이에 법원은 호적을 옮기는 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며 직권으로 말소 명령을 내렸다. 해당 면사무소에서도 근대 호적법이 생기고 이렇게 호적 조작을 통해 끼어 들어온 사실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 할머니의 긴 여정은 드디어 반환점에 도착한 것으로 보였다. 이 같은 할머니의 이야기는 카메라출동에 방송된지 2년 만에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다듬어 '할머니의 투쟁' 이라는 제목으로 시사매거진 2580에 소개됐다. 시청자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법원과 문중을 싸잡아 비판하는 시청자들도 있었고, 자신들의 족보도 변조됐다며 취재를 요청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많은 시청자들이 10년을 훨씬 넘긴 장 할머니의 '조상찾기'에 격려를 보내주었다. 앞으로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할머니는 훨씬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게 됐고,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지난 8년간 이 문제를 취재하며 아무에게도 말못할 나만의 고충이 있었다. 그 고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 때문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고,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혔다. 소재가 족보와 무덤에 관한 것이다보니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려면 다른 기사보다 몇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다. 방송을 앞두고 며칠째 회사에서 밤샘 작업을 하던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책상 위에 온양정씨 문중의 각종 족보를 쌓아놓고 원본과 변조본의 차이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져 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나 싶어 뒤돌아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족보를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족보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의 기록' - 바로 '사자의 서'였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오랜 시간 내가 취재한 것들이 모두 죽은 사람들의 정신과 죽음의 현시인 그들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때 책상 한쪽 구석에 접혀 있던 의금부도사 정술교의 문집을 열어 보았다. 훗날 정술교의 손자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모아 만든 책이었다. 그 책은 의금부도사의 아호가 필명재(必明齋) 였음을 적고 있었다. 필명재! 문득 여느 문인들의 아호와 사뭇 다르다는 생각에 몇 번 반복해서 봤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필명재! 그것은 바로 '나는 반드시 밝히리라'는 뜻이 아닌가. 1세기 전 정술교의 다짐이 백년의 시간을 두고 나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겁 많은 내가 그 날 어떻게 기사작성을 마쳤는지 모르겠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도 의문이다. 그 밤을 새우니 어느덧 창밖에는 아침햇살이 부끄럽게 깔려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무거운 짐 하나를 털어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작업한 기사문서에 대해 '저장'을 눌러야 할 내 손이, '삭제'를 누르고 있는 걸 봤다. 컴퓨터도 놀랐는지,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어, 이러면 안되는데 했지만 다시 '네'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을 막을 수 없었다. 너무도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한동안 멍하게 모니터를 응시했다. 외국의 한 과학자가 수년 동안의 연구실적을 담은 디스켓이 지워져 비관 자살했다는 보도를 본 일이 있다. 지금 그가 내 앞에 있다면 죽겠다는 그를 나는 말릴 자신이 없다.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유영하고 있을 말들을 다시 불러보리라. 결국 기사는 10시간의 사투 끝에 예정보다 하루 늦게 세상에 나왔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방송 중간에 들어갈 스튜디오 녹화분을 촬영하는데 이번에 핀마이크가 속을 썩였다. 마이크를 다는 순간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확인해보니 핀마이크가 손가락을 깊숙이 찌른 것이었다. 핀마이크는 방송 출연자들이 넥타이나 옷깃에 다는 조그마한 마이크다. 아무리 살펴도 마이크에는 사람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낼 만한 구석이 없다. 무엇인가 방송이 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 기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장 할머니가 지나가는 투로 언젠가 내게 던진 말이 생각났다. "여자 혼자 10년 넘게 소송을 한다는 것. 그것도 막대한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을 상대로 말예요….. 사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만두려고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독립문에 계신 그 분이 아니었다면 말이죠." 할머니의 '독립문'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방송을 내보낸 뒤 독립문에 계신 분이 누군지 꼭 한 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이 나가고 며칠 뒤, 그 분이 누구일까 궁금하여 장 할머니께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어느새 유명인이 됐단다. 길거리에서 힘내라고 격려해주는 낯모를 이웃도 만났단다. 그런 할머니에게 방송이 나가기까지 내가 겪은 '기이한' 경험을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다 들으신 후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 너머로 이제 "독립문에 가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장 할머니가 그려준 약도를 들고 그 분을 찾아 도착한 곳은 독립문 공원 역에 있는 작은 점집이었다. 장군 보살이라는 간판이 달린 3층 가정집에 들어서니 작은 법당이 차려져 있었다. 사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한 번도 무속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제발로 점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실내에 자욱하게 고인 매운 향냄새가 께름칙하게만 느껴졌다. 그 곳에서 만난 장군 보살은 5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눈빛이 매서웠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녀 앞에 앉았다. 먼저 그녀의 신통력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생년월일을 물어보던 그녀는 신을 받기 위해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는 갑자기 두 눈을 푸른빛으로 빛내며 아이 목소리로 내게 묻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야. 아저씨는 무척 바쁜 사람인데 어떻게 왔어?" "네?" 놀라서 묻는 내게 그녀는 내가 트렌치 코트를 입고 부지런히 다니며 수첩에 뭔가를 적는 일을 하고 있는게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녀는 그 밖에도 나의 가정사와 주변일을 마치 눈으로 직접 보고 온 듯이 신이 들린 채로 이야기했다. 그 때마다 나는 "그렇다."고 화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을 보고 나서 비로소 나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녀는 잃어버린 친동생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그렇다고 나의 의심이 해제된 것은 아니었다. 몇 년째 뒤쫓고 있는 각종 살인 사건과 비리의혹에 대해 그녀의 신통력을 빌려봤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건일 텐데 그녀는 다시 아이 목소리로 나의 마음을 꿰뚫는 답변을 해냈다. 물론 경찰에서도 혼을 불러 사건을 풀어내는 이른바 '심령수사'를 인정하고는 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너무도 신기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이제 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장 할머니를 만난 경위를 물었다. "장 여사라는 분, 어깻죽지에 힘이 쭉 빠져서 들어오더라구요." "그게 언제쯤 일인가요?" "한 10년쯤 됐죠. 내 앞에 이렇게 앉는데 그 분 어깨 위로 웬 귀신들이 죽 둘러앉아 있는 거예요. 의금부도사도 보이고. 그래서 내가 업죽 절을 했지요." "왜 그러셨나요?" "의금부도사는 귀신도 무서워하는 분이거든요. 하여튼 장 여사라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집안의 귀신들이 그 분 하나만 바라보고 있더라니까요. 그래서 장 여사에게 물었죠. 도대체 당신 누구냐고. 그랬더니 온양정씨 종부라고 하더군요. 그럼 그렇지, 우리 장군이 제대로 보신 거지요……" 그 날부터 그녀는 물심으로 장 할머니를 도왔다고 한다. 나중에 장 할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소송과정에서 위기 때마다 장군보살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뭐니뭐니해도 장군보살의 신통력은 온양정씨 선조들의 무덤을 찾는 과정에서 발휘되었다고 한다. 족보소송의 성격상 기성의 종중이 종손으로 이어지는 선조들의 무덤을 훼손하거나 없애버렸을 때 그 무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지만 드넓은 산 속 깊은 땅 밑에 파묻힌 조상들의 묘석을 일반인들이 과연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귀신과 대화하는 것이 직업인 장군보살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온양정씨 조상들의 묘석을 모조리 찾아냈다. 이채로운 것은 발견된 묘석들의 윗부분이 대부분 파손돼 있었다는 점이다. 묘석이 제자리를 찾게 되자 장 할머니의 고질병인 편두통도 사라졌다고 한다. 독립문의 장군보살을 만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장 할머니 사건을 관장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사회적인 이성회복 장치가 작동되지 않을 때 귀신이 틈입할 여지는 더욱 커질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귀신은 귀 막은 이성에 호소하는 소리없는 외침이기 때문이다. 장 할머니의 '조상찾기'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변조된 법원서류가 상급심으로 전달됐고 그 상급심에서 1심의 결정내용이 번복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2580 보도 이후, 1년 만에 경찰이 종중의 각종 비위사실을 밝혀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나 역시 그런 할머니의 싸움을 지켜볼 것이다. 혹시 장 할머니의 '조상찾기'가 남의 일이라고 느끼시는 분에게 한마디 드린다. 우리나라는 성씨를 근거로 계산하면 무려 53%가 귀족의 후예라는 계산이 된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귀족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귀족의 나라'라는 프랑스는 전국민의 3%만이 귀족의 후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 절반 가량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족보를 사거나 변조해서 양반의 가계에 끼어 들어 왔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일,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일은 그렇게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닌 것 같다. 집에 있는 족보를 펴들고 한 번 생각해 보자. 당신의 족보는 진짜인가? (주: 취재결과가 나오는대로 최종편을 공중파 뉴스보도 이전에 속보로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