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1. 아래 글은 얼마전 출판된 저의 책, '그래도 나는 고발한다'에 썼던 이야기입니다. 뜬금 없이 왜 지난 이야기를 끄집어내냐구요? 물론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이미 제 책을 읽으신 분이라도 다시 한번 '조금은 특이한' 이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말미에 가서는 이 글의 주인공과 그녀의 싸움이 결국 어떻게 끝이 났는지 궁금하게 되실 겁니다. 저 역시 지난 8년이라는 긴 취재여로에서 가장 궁금했던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끝이 보입니다. 곧 나올 대단원의 '속보'를 이곳 '고발뉴스'를 통해 가장 먼저 보고드리겠습니다. 주2. 우선 지난 이야기는 1,2편으로 나눠서 올렸고, 곧 취재결과가 나오는 대로 3편으로 이어드리겠습니다.) 세상 이야기를 '팩트'(fact)로서 전달해야 하는 기자로서 이 같은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은 조금은 난감한 일이다. '팩트'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사실만을 그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진실이 엄존한다. 문학은 물론이고 철학이나 때로는 사회과학에서조차 이성의 설명을 뛰어넘는 직관과 영감이 대단히 중요한 논리적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팩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나는 이 일로 인해 기자로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팩트 취재의 범주를 넓혀야 하며 그 접근 방법에 대해서도 보다 다양한 고민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내가 장금자 할머니를 만난 건 97년 초, 겨울이었다. 경찰 출입을 마치고 법원 출입기자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아직 기자실에서 법정까지 가는 길도 깨치지 못했을 정도로 신출내기였다. 취재차 들어간 법정에서 난생 처음 종중(宗中)소송을 참관했다. '몇 대 할아버지가 어떻고, 몇 대 할머니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 별일들 가지고도 다 소송을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 족보는 변조된 것입니다. 누구는 끼어 들어왔고, 누구도 끼어 들어왔습니다." 60이 막 넘었을까? 초로의 할머니 한 분이 소리 높여 자기 주장을 펴는데 그 말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재판이 끝나고 복도에서 그 할머니를 만나봤다. 그 분이 바로 장금자 할머니였다. 사실 종중 재판은 재산권 싸움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가문과 이재에 밝은 남자 어른들이 소송의 양 당사자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장금자 할머니는 종중 재판에서는 역외자라 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 더구나 저명한 원로 변호사와 한 팀이 된 대종중을 상대로 싸우고 이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할머니에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는 조금은 판에 박힌 말과 함께 명함 한 장을 건넸었다. 그 후 한두 달이 훌쩍 지났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온 것도 그 쯤이었다. 마지막 겨울이 창밖에서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밤, 할머니는 두 손 가득 바리바리 싼 서류보자기를 들고 회사에 나타났다. 따뜻한 차를 권하고 서류뭉치 너머로 장 할머니와 마주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어쩌면 그것은 한에 서린 주술과도 같았다. 족보학과 민사소송법상의 전문용어를 써가며 자신의 싸움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까지 왔는지 말해 주었다. 10년이 넘게 홀로 싸워온 여성의 한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는 기자를 처음 만난 때문인지, 할머니는 애원 어린 눈빛과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낯선 말들로 자신의 속내를 풀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다보니 벌써 창밖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장금자 할머니의 남편은 15년 전 세상을 떴다. 아버지 없이 세 자녀를 키우느라 눈물마저 마른 어느 날 자식들이 아버지와 가문에 대해 물어 왔다. 자식들을 교육시킬 요량으로 아는 친척집에 가서 족보를 얻어 왔는데, 거기 보니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온양정씨 종손이었다. 남편은 살아생전 할머니에게 집안 내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문중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종손이 아들을 데리고 기제사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조상들의 묘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배후에 현재 문중 대표자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장 할머니는 그 무렵부터 심한 편두통을 앓기 시작했다. 족보를 뒤져가며 조상들의 무덤 위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독 남편과 아들로 향하는 집안 종손들의 무덤만 훼손되거나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장 할머니는 현재 문중을 장악한 사람들이 중중가를 말살하기 위해 종손으로 향하는 가계의 어른들 무덤을 하나하나 없애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산을 지키던 전국의 산지기 노인들을 만나보았단다. 그들을 통해 조상들의 무덤을 현재의 종중이 개장신고도 없이 마구잡이로 파헤쳤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조상을 찾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한 분 한 분 알게 될수록 조상들은 훌륭한 분들이셨다. 특히 남편의 증조할아버지인 정술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장 할머니는 일종의 사명감을 키우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정술교는 온화한 덕망과 신묘한 혜안으로 구한말 대원군과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종은 정술교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그에게 요즘 검찰총장에 해당되는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내린다. 정술교는 충렬공 민영환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비탄에 젖은 민영환이 자격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후에는 전국적으로는 선비들의 궐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의 꼿꼿한 선비적 기개는 일제강점 후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져 정술교의 장손 하영은 3.1운동 과정에서 폭탄을 안고 자폭하기에 이른다. 일제는 현재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정술교의 본가를 중심으로 강도 높은 감시와 견제에 들어갔다. 갈수록 잔혹해져 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결국 정술교 일가는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렇게 훌륭한 조상을 칭송은 못할망정 종중 사람들은 조상들의 묘를 없앤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정술교를 일제의 앞잡이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그 길로 조상들의 무덤을 허가없이 훼손한 종중 집행부를 고발했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미 막대한 양의 종중 땅을 팔아 집안을 일으키고 국회의원과 행정부 요직에까지 종원을 진출시킨 종중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소에 따른 무고소송이 빗발쳤다. 종중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위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는 음해마저 제기됐다. 특히 자녀들의 만류는 할머니를 더욱 힘들게 했다. "어머니 그만두세요. 어디 저희가 먹을 것 없어서 그런 소리를 듣습니까!" "내가 무슨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니. 너희를 위해서라도 조상을 찾아야 한다." "그래도, 무덤을 찾는다는 게 사람들 눈에는 땅을 찾자는 거로밖에 더 보이겠어요?" "안다. 그래도 이 일은 종부로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다. 곧 죽어 니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을 뵈어야 하는데,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그 분들을 뵐 낯이 없다. 만일, 무덤을 되찾아 돈이 생긴다면 그건 사회에 환원하면 되지 않겠니?" 이처럼 집안에서도 법정에서도 장 할머니에게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눈물로 지새는 밤이 늘어만 갔다. 청상에 과부가 되어 자식 키우는 재미에 홀로된 고통을 잊었는데 뒤늦게 뛰어든 법정싸움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식에게서 조차 따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소송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할머니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던 종중 어른들로 하나 둘 등을 돌렸다. 모든게 비관적이었다. 그렇다고 도와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궁리 끝에 장 할머니는 국내 족보학의 대가들이 묘여 있다는 정신문화연구원을 찾았다. 그 곳에서 할머니는 족보가 변조된 것이며, 지금 종중을 구성한 문중 대표들이 하나같이 족보를 위조해 끼어 들어온 사람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라는 해석을 받아냈다. 그 결과를 가지고 법정에 갔다. 하지만 법원은 정신문화연구원의 족보 전문가들의 해석을 배척했다. 설령 족보에 이상이 있더라도 현재의 문중이 그 동안 선조의 무덤을 관리해왔기 때문에 후손이 맞다는 게 이유였다. 어쩌면 현역 국회의원과 권력기관의 간부들이 장악하고 있는 문중과 만서 싸우려던 자체가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장금자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한 가닥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할머니는 나를 대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홀로 싸워온 날의 고독과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나를 만난 단 일조도 허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마치 신이 들린 듯 지나간 날들의 억울함을 내게 하소연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견디기 힘든 대화였다. 할머니와 헤어진 후 나는 아마 그가 미쳤거나 곧 미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틈나면 한 번 검토해보리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의 서류는 그 후로 한동안 어두운 캐비닛 속에 방치됐다. 그리고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그 동안에도 할머니는 지칠 줄 몰랐다. 법원을 떠나 대검찰청으로 출입처를 옮긴 나에게 이따금 연락을 해왔다. 대부분 관련 소송에서 졌다는 힘 빠지는 내용이었다. 적어도 할머니가 지고 가는 세상에 진실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뿌리치지 않는 나의 손길에서 그는 유일한 위안을 찾는 듯 보였다. 그런 할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따금 유사판례나 관련 법조항을 찾아 참고하라며 전해주는 것 정도였다. 2년 동안의 검찰출입 기간을 마치고 MBC 9시 뉴스테스크 '카메라 출동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나서야 그 동안 받아둔 각종 제보서류를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할머니의 파일도 그 때서야 다시 꺼내 들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무의미해 보이던 족보라든가 가계도 상의 말들이 비로소 살아 있는 말로 내게 다가왔다. 급기야 장 할머니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할머니는 이번 사건을 취재해 보겠다는 나의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아무도 신뢰해주지 않고 방치한 사이 할머니의 말은 더 빨라졌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의 기운이 서리어 있었다. 할머니와의 만남이 있은 후 먼저 종중의 대표들이 족보에 끼어들어 왔음을 증언한 정신문화연구원의 전문위원인 조기대, 김동주 씨 두 분을 만나봤다. 그 분들은 살아 있는 선비들이었다. 돈 한푼 받지 않고 진실을 말했다가 국회의원을 앞세우고 쳐들어온 종중 대표들에게 항의를 받고 심지어 경찰에 고발까지 당했지만 취재가 시작된다면 언제든지 다시 입을 열겠다고 약속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만큼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그 분들은 말씀했다. 문제는 데스크였다. 변조된 족보와 법원의 외면. 언뜻 재미있는 뉴스 소재처럼 보이지만 사실 방송 아이템으로는 빵점이다. 일단 방송기사로 풀어내기에 너무 복잡하고,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영상구성도 쉽지 않다. 더구나 내용이야 어떻든 법원이 내린 판결을 뒤집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데스크는 쉽사리 취재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데스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전 취재를 통해 기사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 한 방법으로 정신문화연구원 명의로 족보가 변조되었음을 증빙하는 공문을 받아냈다. 법원의 판결에 국가 투자 연구기관이 전문성을 내세워 이를 뒤집은 입장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무덤이 아무런 신고 없이 파헤쳐졌음을 말해주는 관공서의 서류도 입수했다. 결국 데스크는 취재 허가를 내려주었다. 이젠 취재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만 하면 되었다. 무덤이 파헤쳐진 현장을 돌아다니며 산지기 할아버지들의 진술을 듣고, 해당 지자체의 담당자들도 만났다. 충청도 일대의 일부 선산은 택지로 개발돼 대규모 아파트 단지나 종합운동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수백 억 원대의 엄청난 이권이 이미 상당부분 종중을 통해 매각된 후였다. 취재가 무르익을 무렵, 정신문화연구원을 찾았다. 족보 전문위원들은 일제 말엽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족보가 변조됐다고 했다. 온양 정씨 족보의 경우도 전형적으로 후세에 변조된 족보라는 것이다. 해방 전후 두 차례의 족보 개정을 통해 80이 넘은 사람이 아들을 낳았거나 아니면 죽은 사람 밑으로 새 아들이 들어가는 형식으로 수십명이 온양 정씨 족보에 끼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 끼어 들어온 사람들의 원래 성씨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전혀 다른 성씨의 후손들이 이제껏 남이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 대규모 땅 장사를 해왔다는 말이 된다. 알 수 없는 서글픔과 함께 분노가 밀려왔다. 일주일 가까운 취재를 거쳐 카메라출동의 타이틀을 달고 드디어 '족보변조 사건'이 방송을 탔다. 하지만 카메라출동 방송은 나에게나 장 할머니에게나 긴 여정의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당신의 족보는 진짜입니까?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