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취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보니 낯익은 노란색 대봉투가 책상위에 올려져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일지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뜯어봤더니.. 역시나 였다. 2003 가합 53003 손해배상청구.. 얼마전 <미디어비평>에서 보도한 기사와 관련해 소송이 제기된 것이다. 신문 보도사진의 광고성을 지적하는 기사가 나갔는데, 일간 신문 사진부장들이 해당 기사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각 5천만원에서 1억원씩 모두 5억5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이제 21번째 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단 한번이라도 소송을 당해본 사람은 알것이다. 사소한 소액사건에서 이혼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사건이라도 일단 소송이 시작되면 당사자들에겐 피를 말리는 고통이 시작된다. 나 역시 그런 소송이 지겹도록 싫다. 그런줄 알면서도 이미 20번의 소송을 당했다. 나는 왜 이럴까. 경험을 거치며 나쁜 자극은 피하는게 교육의 기본 아니던가. 이제 소장이 접수됐으니 또 나는 다시 소송이 요구하는 그 모든 지겨운 일들을 고스란히 치뤄내야한다. 당장 법원에 제출할 '취재 경위서'를 작성해야하고, 준비해 놓은 각종 증거서류와 녹취테잎을 꼼꼼히 점검해 그 사본을 변호사에게 제출해야한다.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야할지 이미 나는 잘 알고 있다. 만성적인 소송에 시달리다 보면 알게모르게 피해의식에 사로 잡히게된다. 더구나 방송기자는 대중에게 얼굴을 파는 일을 한다. 국회의원에 나갈 사람에게는 좋은 일일줄 모르나 나 처럼 남 싫은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위험한 짓이다. 평소 행동거지가 무척 제한된다. 생각해보라. 나에 대해 악감정을 지니고 있을 누군가가 군중 속에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 것을.. 문득 소름이 돋는다.     자신들에 대한 기사만은 제발 쓰지 말아달라는 달콤한 로비 뒤에는 항용 엄청난 대가에 대한 제의가 따라붙는다. 물론 거절에는 가혹한 민형사 소송과 검찰조사가 기다리고 있다. 항상 소송이 쫓아다니는 내게 사내외적인 시선이 그리 따뜻할리 만은 없다. 어느덧 소송 제조기라는 '악명'을 얻었다. '너는 왜 기사만 쓰면 소송이 따라붙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너는 과연 어떤 기사를 써왔느냐'고 되묻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게 나는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나와의 싸움이었다. 이번 역시 그러할 것이다. 'mbc가 하나님이냐'던 만민중앙성결교회 군중들의 mbc 난입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렇다면 과연 넌 옳으냐' '너의 정의는 정녕 너 만의 정의가 아니던가'.. 단 한번도 날 포기하지 않았던 근원적인 물음이 이번 역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아직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불패신화 보다도 언제 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하여 얻게될 비난과 책임에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고발내용을 담은 편집 테잎을 방송용 데크에 넣으며 느끼는 진땀나는 긴장과 그때부터 소장을 받게될 때까지의 초조함이 나는 싫다. 장맛비가 내리는 누런 한강을 바라본다. 강 밑바닥으로 부터 요동치며 흐르는 한강을 내려보다 그만 누런 소송 봉투를 닫아 버렸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글쎄... 한번 사는 인생, 한번 하는 기자질에 나는 이 길 외엔 달리 갈 방도가 없는 바보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