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은어(隱語)의 시대였다. 세미나는 '미나' 팜플렛은 '팜' 투석조는 '썩' 거의 모든 말들이 내부인이 아니면 알아듣기 힘었던 - 말로 금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은둔하던 시기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대화를 허용하지 않았던 비정상적인 사회체제 탓이 컸으리라. 그 시대 나를 사로잡은 단어는 혁명이었다. Revolution... 정말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던 그말은 그저 'R'이라고만 언급되었다. 예수도 내게는 'R'이었고 사랑도 'R'의 현신이었다. 'R'에 대한 동경은, 혁명적 전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을 것처럼만 보였던 막막한 시대상에 대한 소리없는 도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을 바꾸는 'R'은 나 자신에 대한 개혁으로 부터 시작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고 또 어려울 수도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이거다. Courage to say 'No' 그렇다 자기 혁신의 동력은 치열한 전투의식에서만 나온다. 그로부터 10여년 동안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담기위해 많은 날들을 어둠속에서 헤멨다. 그것은 들판에 홀로 서는 일이기도 했고, 또 인파속에서 고독해지는 훈련의 나날들이었다. 자연히 남들이 꺼리는 현장 취재 부서만을 떠돌았고, 어느덧 후배들 사이에는 '객지 생활 이제는 그만하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연제협 사태'가 불거졌고 'PR비 사건'으로 선배 PD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소송이 물밀 듯 들어왔고 하나둘 세어보니 20번이 넘는 파도를 거쳐왔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혹자는 '네거티브 어프로치의 말로는 그리 좋지 못하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 떠날 채비를 갖추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 마음에 그린 그런 '기자'의 모습으로 살다 가겠노라는 그런 제법 숙연한 생각을 하는 횟수도 잦게 되었다. 이번주 <미디어비평>은 25년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을 다룬다. 37명의 당대 유명 언론인들이 프리미엄 한 푼 내지 않고 고급 아파트를 특혜로 꿀꺽 삼켰단다. 역사는 아무도 그들을 단죄하지 않았다.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오늘 우리의 약속이 진실로 빛날 수 있기 위해, 과거의 거짓말을 찾아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지난한주 취재 차량에서 흔들리며 새로운 화두를 얻었다. Courage to say 'I'm sorry'..  과거 특혜의 당사자들을 만나봤지만 어느 누구도 당시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시인하고 사과하려 하지 않았다. 사죄할 줄 모르는 마음은 죄를 지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만을 키운다. 잘못을 시인하고 머리를 낮추는 사이, 얼마나 큰 화해의 여백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인지 왜 똑똑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온 몸을 땅으로 낮춰 큰 절 올리는 스님의 머리 위로, 그 만큼 높아진 하늘의 깊이가 있다. 깊은 하늘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를 위한 호흡의 공간일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 어쩌면 그 용기를 강요하는 나의 만용은 또 얼마나 '미안할' 일인지 - 방송 녹화를 코 앞에 앞둔 이 시각, 손을 모으고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