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원로의 ´지혜´가 아쉽다. 병석에서 회복 중인 리영희 선생을 찾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본지는 상황이 허락하는대로 리영희 선생의 육성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있는 시각을 전달할 예정이다. <편집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지 닷새 째가 되던 날. 경기 산본 수리산 밑에 자리잡은 리영희 선생의 자택을 찾았을 때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이 울려나왔다. "요사한 명분 아래 일체의 보편적 가치조차 짓밟는 미국의 침략 행위를 듣고도 보고도 싶지 않다"면서 말문을 연 선생은 "그래서 인간이 평화롭게 살기 위한 뜻을 담은 ´전원´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미 언론조작 베트남전 복사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는데요?‥"라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침공이 아니라 그건 명백하게 침략"이라고 일축했다. "국제법이나 정치적 관례나 도의상으로나 미국이 역대 전쟁재판에 적용한 모든 규약, 법조문의 가치판단에 의하더라도 ´침략´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침략은 남의 나라를 침범하여 영토를 빼앗는 것이고, 침공은 침노하여 쳐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는 기자와 논설위원, 칼럼니스트, 평론가를 포함한 언론인들이 명심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로 "개념과 일치하는 정확한 용어, 언어, 표현을 쓰라"고 당부했다. "기자들이 상황과 언어의 개념을 일치시켜야 하는데, 함부로 문장을 쓴다"면서 "사각형을 삼각형으로 쓰면 독자에게 정확하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발표 묘사하는 언론조작, 다시말해 미국은 선이고 이라크는 악이라는 ´언(言)´과 ´설(說)´의 조작을 우리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면서 "´미국 부시가 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우선 판단한 뒤 표현을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침략자의 일방적인 언론조작 행태를 보면 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던 때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말했다. "그때도 미국 정부는 지금과 같은 논리로 선전했다. 베트공을 악의 덩어리로 묘사하고, 자신들이 군사력으로 전쟁하는 것은 선이자 평화와 정의를 위한 행위로 정의했다"면서 "미국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베트남 사람 400만이 죽었다"고 기억했다. 미국을 제국주의로 단정한 그는 "언어를 개념과 일치시키는 과정은 투철한 자기비판적인 의식이 선행돼야 가능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면서 언론인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재직했던 65년부터 68년까지 ´북괴´로 통용되던 용어를 ´북한´으로 바꿨던 치열한 경험을 설명했다. "68년 원산 앞바다에서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한 사건이 터졌다. 미국은 북한을 소련이 지배하는 괴뢰인 줄 알고 푸에블로호 석방을 위해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은 동시에 한반도 주변에 엄청난 군사력을 대놓고 ´한판 치겠다´는 압력을 북한에 가했다"고 회고한 그는 "1년에 걸친 어떤 압력도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존슨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고 함장이 각서를 쓰고서야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석방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이 북한을 굴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외교적으로 항복한 셈인데, 이를 본 세계가 깜짝 놀랐다. 미국에 꼼짝 못하는 남한을 보고 북한을 ´괴뢰´로 오판한 것인데, 소련 군대가 주둔하지 않은 북한은 소련에 전혀 예속되지 않았다"면서 그 뒤 ´북한´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이를 두고 ´용공´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정보기관을 비롯한 주변의 압력이 심했으나 2∼3년이 지난 뒤 다른 신문들도 ´북한´으로 표기하며 따라왔다고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따른 한반도 위기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반도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또 미국이 그런 식의 언질을 줬는지 모르지만 이는 ´미국을 근본적으로 잘못 보는 시각´"이라고 단언했다.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을 제국주의로 단정한 그는 "미국은 남의 나라 사정을 봐서 목표를 수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는 게 미국의 본질"이라고 경고했다. 기자들 언어와 개념 일치 노력 부족 마지막으로 언론인에게 사유의 철저함을 거듭 강조한 그는 <논어>의 정명(正名) 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말´과 ´글´이 표현하려는 대상의 성질이나 어떤 개념을 정확히 이름지어야 정치가 바로잡히고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공자의 정명론"이라면서 "편집국 간부들부터 기사의 이름(명칭 표현 묘사…등)이 정확해야 한다는 공자의 꾸지람을 배워야 한다고 질타를 담은 화두를 던졌다.   정리=신미희 기자  mihee@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