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는 사냥을 끝낸 뒤 사냥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저 평안히 누워 쉴 뿐이다. 인간은 기억하며 기록하며, 그것을 이어 붙여 역사를 만든다. 기억과 기록이 책이다. 책은 기록자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고 있을 물건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도 기록자마다 다를 수 있는 것은 정체성의 차이 때문이다. 정체성을 담지 못할 바에는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다. 사자처럼 누워 쉬는 게 마땅한 것이다. 지난 해 한 권의 책에 누구의 정체성이 담겼는지를 따져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상식은 ‘따져보나 마나 아닌가, 저자의 정체성이지’다. 미술계와 방송계 모두에 종사하는 한젬마 MC의 책을 둘러싼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그의 홈페이지(http://www.artjemma.com)를 방문하여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젬마 글마당’이라는 곳에 올라온 글들을 몇 개 읽어보았다. 2006년 2월26일에 쓴 ‘예술가’라는 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글들은 정체성 보존을 위하여 맞춤법, 띄어쓰기 등까지 있는 그대로 옮긴다). “이 세상에 곳곳에는 자신이 예술가인지조차 모르는 예술가들도 있고 그저 자신이 예술가라고 자처하는 포장된 예술가들도 있다. 어느쪽에 있던 본인이 행복하면 된다 진실과 가치는 역사가 기록할터이니” 진실과 가치는 역사가 기록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인간과 짐승을 구별할 줄 아는 듯했다. ‘이 정도로 철저한 자의식을 가진 이를 대필로 몰아부치는 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006년 4월2일에 올린 ‘젬마는 반성한다’라는 글은 객관적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에 대한 자각적 반성을 그 특유의 감성적 문체(문체는 지문과 같다고 하지 않은가!)로 잘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몇 구절을 음미해보자. 일단 그는 방송을 시작할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애절하게 서술한다. “아카데미 정통 코스를 밟고 방송매체에 뛰어든 나는 일단 방송 매체에 대한 접근적 나의 태도부터 질탄을 받기 시작했고 리포터라는 타이틀과도 싸워야 했으며 일단은 그 매체의 시스템을 익히는 작업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길을 여는 이는 언제나 이처럼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법이다. 그러다가 그에게도 좋은 날이 왔다. “그렇게 어엿 햇수를 거듭하면서 미술 전문 MC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거머쥐게 되었는데….”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자신이 방송인이냐, 출판인이냐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한다. 미술계에서는 자신을 방송인이라 하지만 “차라리 매체로 말하고 싶다면 진실은 출판 쪽과의 연계가 옳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자신을 출판 쪽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치열한 자기 반성을 계속한 사람이 쓴 것이었기에 그의 책은 이주헌 미술평론가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예술이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게 해주는지, 예술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주는지, 살랑이는 바람처럼 살갑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그의 작은 목소리는 어느덧 파르나소스 언덕 무사이(뮤즈들)의 메아리가 된다.” 치열한 자기 반성과 저명한 미술평론가의 추천,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치 않았다. 한젬마 MC를 ‘자신이 필자라고 자처하는 포장된 필자’로 매도하는 것은 아니 될 말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각설하고, 전통적 의미의 기록자들인 신문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젬마 MC사건을 기록하였다. 그 사건을 쟁점으로 만들었던 신문은 2006년 12월 28일자에 이렇게 적었다. “스캔들의 주모자들이 면죄부라도 되는 양 당당히 내민 ‘’출판계 관행”이라는 말은, 모든 책의 표지를 정직함의 공간이 아닌 “관행적 기만의 공간”으로 싸잡아 타락시켰다.” 다른 신문은 2006년 12월29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욕심이 지나쳐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대필논란을 빚거나 한젬마씨의 책처럼 저자와 구성작가의 분란을 부르기도 했다.”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이처럼 기록자마다 다른 것이다. 어쨌든 후자의 기록을 본 나는 ‘한젬마MC가 구성작가들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었나 보다, 밥이라도 한번 본때 있게 살 일이지, 재승박덕이로고’ 하였다. 뒤늦은 깨달음이 있었던 걸까. 사태가 사람들 머리에서 잊혀져 갈만하다 싶은 2007년 1월 10일 어떤 신문에 “화가 한젬마씨가 과학학습지 광고 모델로 출연, 모델료 전액을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한젬마씨, 불우한 영재학생 돕고 싶어”라는 제목을 달고 실렸다. 참으로 여러 사람이 애쓰고 있다. (강유원: 철학박사, 미디어오늘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