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무더위에 한줄기 시원한 비를 본다. 보도국 후배인 임명현 기자가 본사 홈피에 올린 글이다. 한번 사태에 대한 명료한 판단을 잃게 되면 그로부터 통제불능의 무의식에 빠지게된다. 그게 기자사회다. 임 기자의 글은 외로운 선배의 눈에 작은 희망으로 비췬다. 그의 생각길이 숲의 어둠속에서 훼손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썩 잘 벼려진 신예 기자의 기운을 느껴보시라.) 6월 중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밤은 늘 시끄러웠다. 밤 11시에 그날의 모든 월드컵 경기가 끝나면 머물던 숙소 앞 8차선 도로는 온통 그날 경기를 치른 나라의 국기들로 뒤덮였다. 어제는 스웨덴, 오늘은 이탈리아, 내일은 크로아티아 이런 식이었다. 차량은 정상적으로 다닐 수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몸에는 국기를 걸고 손에는 맥주병을 든 채 저마다의 축제를 즐겼다. 제각각 불고 쳐대는 나팔과 북소리에 잠을 이루기 힘든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독일에 살고 있거나 독일로 응원을 온 그 나라의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유럽이다 보니 아무래도 태어난 나라와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을 테고 축구팬으로서 원정 응원을 오는 것도 수월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스웨덴 국기가 도로를 뒤덮건 이탈리아 국기가 인근 식당을 점령하건 간에 그들 인파 중 상당수는 독일인이었던 것이다. 브라질과 호주의 경기가 열렸던 뮌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응원 인파 인터뷰를 하기 위해 얼굴에 국기를 그리고 화려한 응원 복장을 갖춘 이들을 만나보면 절반 이상이 독일인이었다. 문득 4년 전 한국의 상황이 상반된 이미지로 떠올랐다. 당시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의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이나 인기 있는 몇 팀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의 경기에 어떻게 관중을 동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그래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제3국 서포터스’를 모집해 보기도 하는 등 여러 아이디어를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파라과이의 조별리그에는 고작 천여 명이 입장했고, 독일의 16강전 경기 관중도 전체 수용인원의 절반을 넘지 못했다. 당시 경기를 마친 독일 골키퍼 올리버 칸은 “분데스리가 2부 경기에도 이것보다는 많이 온다”며 쓴 소리를 내뱉었다. 거리응원의 엄청난 열풍 이면엔 이렇게 초라했던 현실도 있었던 것이다. 자국은 물론이고 제3국들의 경기도 꽉꽉 들어차고, 그 마저도 모자라 제 나라도 아닌 나라의 국기를 몸에 걸고 밤새 축제를 즐기는 이들의 정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4년 전 제3국의 경기들을 철저히 외면했던 이들이 4년 후 새벽 4시라는 시간에 백만명 넘게 몰려나와 응원을 벌이는 정서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경우 모두 축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티브는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축구’로 인한 축제이고, 후자는 ‘대한민국’에 동기를 둔 축제다. 월드컵을 즐기는 동기와 방식이 다른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사고파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세계를 창조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여가와 축제에 목말라한다. 이 예리한 목마름에서 스포츠는 그 의미를 찾는다. 한국뿐 아니라 어디서나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상한 건, 주류 미디어의 프로그램이나 각종 자본의 광고를 들여다봤을 땐,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은 축구 열기를 자랑할 만한 한국이 그 실제 모습에 있어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제3국의 경기와 자국 리그(K리그)를 외면한 채, 1년에 몇 번 치르지도 않는 국가대표팀 축구경기에만 온통 목을 매다는 현실은 결코 ‘축구 열기’로 봐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거리응원 인파는 ‘축구’에 대한 갈증이 아닌 ‘축제’에 대한 갈증에서 생겨난 거라고 나는 감히 결론을 내린다. 미디어와 자본의 기만은 그래서 더욱 유쾌하지 않다. 뉴스를 월드컵으로 도배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시대가 변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이제 예전만큼 정치뉴스나 경제뉴스가 중요하지 않고 ‘스포츠뉴스’가 큰 의미를 갖게 됐다고. 그러나 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 ‘스포츠’라는 건 철저히 월드컵을 비롯한 A매치, WBC, 미셸 위, 하인즈 워드 등 그림과 장사가 되는 스포츠의 범주에만 국한돼 있을 뿐이다. 월드컵 기간 미디어가 보여주는 축구에 대한 열정은 K리그와 N리그(2군리그), 대학축구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인즈 워드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국내 무명 럭비선수들에게로 전혀 전가되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끝나지 않은 신화, 우리는 대한민국”을 외쳐대며 하나됨의 축제를 강요하는 그들은 정작 우리를 하나될 수 없게끔 하는 양극화와 사회적 빈곤의 문제에 침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더욱 방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는 거리에 나와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외친다. 우리는 축제에, 노는 것에 목마르기 때문이다. 맞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에, 혹은 노동을 준비하는 삶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축제와 여가에 목말라하는 건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월드컵의 축제를 낳는 모티브가 ‘축구’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한 문제다. 축구로서 축제를 즐긴다면 우리는 한국의 경기뿐 아니라 모든 월드컵 경기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 응원을 통해 타국의 사람들과도 연대할 수 있다. 축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자국리그를 활성화시키는 등 그 토대를 더욱 튼튼히 할 수도 있다. 그래서다. 미디어와 자본, 월드컵의 유쾌하지 않은 결합을 지적하는 문화연대의 비판은 올바르다. 역설적으로 문제는 그들의 비판이 너무나 성실하다는 것에 기인한다. 지속성을 담보한 성실한 비판은 비판을 당하는 이들과 비판 바깥의 제3자들에게 싫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부 문화주의자들의 “너희들의 비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즐기는 시기 아니냐. 즐길 때는 같이 좀 즐겨보기도 하고 그러자”는 식의 역비판은 성실한 비판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싫증이, 문화주의적 역비판이 미디어와 자본-권력의 기만에 대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자는 주장의 올바름 자체를 상쇄해서는 안 된다. (임명현 / MBC 보도국 기자, 사회2부,  현 스포츠 취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