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보다 미국을 사랑한 한국인 깡패도 비굴한 놈을 더 팬다 일본이 망한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던 철부지 국민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2년생이 미국인을 처음 본 것은 해방이 되고 며칠 후였다. 미군이 들어온다고 해서 구경을 갔더니 군인을 가득 실은 트럭이 줄줄이 오고 있었다. 맨 앞에 지프차가 오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운전을 하는 군인의 얼굴이 새까맣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새까만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노랭이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어른들은 환영을 한다고 박수를 치는 데 미군들도 기분이 좋은 지 활짝 웃었다. 까만 미군도 웃었는데 유난히도 하얗던 이빨이 기억에 남는다. 미군들은 우리들에게 뭔가 던져 주었다. 그게 바로 껌이고 초코렛이었다. 그 후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미군부대 앞에서 살았고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깜둥이 흰둥이(그렇게 불렀다)만 보면 “핼로 껌. 핼로 쪼꼬렛”하고 손을 벌렸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영어가 뭐 좀 달라는 구걸형 영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부대 근처에는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이 서성거렸고 우리의 이쁜이와 순이는 미군전용 캬바레에서 키 큰 미군 품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달러와 사랑을 바꾸었다. 그 때 나는 친미였을까 반미였을까. 나는 양코배기(그렇게 불렀다)와 우리의 누나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친미도 반미도 아닌 그저 껌이나 주고 초코렛이나 잘 주면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철부지 친미주의자였다. 6.25전쟁이 터졌다. 서울을 사수한다는 이승만의 사기방송 덕분에 고스라니 서울에 남아 타의에 의한 비도강파 반동이 된 16세 소년은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져 온 손재봉틀을 대가리만 달랑 떼어 들고 시골에 가 보리쌀과 바꾸었다. 지금의 분당 쯤 될 것이다. 느닷없이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 온 미국의 무스탕 전투기는 피난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고 나는 길 가 논두렁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기어 나온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철이 들어서 보게 되는 전쟁영화의 장면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흰옷 입은 사람들. 달구지를 끌던 황소도 쓰러져 죽고 뒤에 방송작가가 된 나는 그런 것을 아비규환이라 했던가. 그 때 나는 친미였을까. 반미였을까. 기총소사 맞아 죽을까 겁이 난 16세 청소년은 왜 죄 없는 피난민들에게 총질을 했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이 영구 집권을 기도하며 부정선거를 하다가 4.19혁명으로 쓰러지고 장면의 민주당정부는 박정희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박정희 군사독재는 추하게 종을 쳤고 전두환 노태우는 정상적인 세상이라면 꿈도 못 꿀 대통령이란 자리에 앉았다 사라지고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렀다. 그 동안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어떤 관계였을까. 국민들에게는 호랑이 같은 군사독재 정권도 미국에 대해서는 순한 양이었고 미국이 사래가 들려 기침이라도 하면 혹시 심기가 불편한거나 않으신지 눈치를 살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참여정부가 들어 선 후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하겠다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마디 하자 “아이쿠 노무현이 드디어 사고 치는구나” 하면서 가슴 졸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미국이 부축해 주지 않으면 한 걸음도 못 걷는 어린 아이 같은 존재가 바로 한국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유식한 사람들이 말한다. 한국인은 원래 남한테 의지하고 사는 데 익숙해서 절대로 독자적으로는 못산다고 말이다. 하늘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지만 한국이라는 땅 덩어리가 묘한데 자리 잡고 있어서 대대로 남의 나라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고 결국 일본에 먹혔다가 역시 남의 덕에 해방됐으니 별 수 없이 또 눈치꾸러기 신세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5.18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도 미국만은 무서웠던지 어떻게든 미국의 인정만은 받으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한 걸 보면 역시 미국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지식인들이 말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라고. 8.15 광복의 은인이며 6.25 때 우리를 지켜 주지 않았다면 한 반도가 온통 빨갱이 천지가 되어 버렸을 것이고 미국이 밀가루라도 주지 않았으면 뭘 먹고 살아남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하고 은인으로 모셔야 하고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는 건 용서받지 못할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 ‘머리 검은 짐승에겐 은혜를 베풀지 말라’는 우리 옛말이 있는데 바로 머리 검은 짐승이 인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배신을 잘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길 하다 보니까 마치 한국이 미국을 배신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진짜 우리가 미국을 배신했을까. 배신한 기억이 안 난다. 정말 고분고분 갓 시집 온 새댁처럼 얌전하게 말을 잘 들었다고 생각한다. 시시콜콜 다 얘기 할 수 없지만 큼지막한 것만 추려도 베트남전쟁 참전이라든지 명분이 없다는 이라크 전에 군대를 보낸 것도 다 미국의 입장을 배려한 한국 정부의 눈물겨운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한국이야말로 미국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견마재비가 아니었을까. 정부가 하는 일을 국민이 어찌 다 알 수 있으랴만 국민은 한국이 미국한테 할 만큼은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는데 큰 몫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냥 공짜로 지켜주는 것만은 아니고 미국이 한국 덕을 보는 것도 많고 한국의 정치적 군사적 가치는 마냥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부모자식 간에도 이해를 따지는 요즘 세상이다. 한 마디로 미국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우리가 그냥 예뻐서 도와준다고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서로 주고받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도 미국에 대해서 너무 껌뻑 죽지 말라는 얘기다. 지난 얘기지만 6.25때 부모 잘 만난 친구들은 총 맞아 죽을 걱정 없는 미국으로 날랐다. 미국에서 좋은 음식 먹고 좋은 대학 다니고 박사간판 달고 돌아 온 친구는 99%가 미국인이 되어 있었다. 얼굴은 한국인이었지만 정신은 미국인이었다. 한국말도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고 그게 아니꼽고 더러워서 상대도 안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게 모두 열등감 때문이려니 반성도 하고 다시 만났는데 가장 답답한 것은 그들이 한국보다 미국을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데 무슨 죄가 있으랴만 잘 잘못은 따지지 않고 그저 무조건 미국 얘기만 나오면 끼고 도는데 이건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잣대는 미국이 최고요 한국은 저 아래였다. 미국은 최선이요. 한국은 최악이었다. 자기비하도 이 정도면 확실한 금메달이었다. 웃기는 얘기 한 마디 하자. 친구 중에 고급 관리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망원경을 하나 사왔다. 역시 미제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자랑을 하기에 구경을 했는데 글쎄 한 구석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작은 글씨로 써 있지 않은가.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은 내가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미국 유학 가서 공부 많이 하고 고급 공무원 노릇 하는 인간의 사고가 이 정도라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든든한 방파제임에는 틀림없고 또한 우리의 안보도 일정부분 보장해 주는 우방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손놓고 있는가. 우리는 몽땅 미국만 의지하고 뒷짐 지고 있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있는가. 없을 것이다.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너무 심하고 미국이 없으면 당장 무슨 일이 날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때문에 국민들의 의식을 왜곡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까지도 변질 시킨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공포 비슷한 고정관념을 가진 한국 국민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절대로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원칙 같은 것이 있고 그래서 그들은 미국인 보다 도 더욱 미국적이며 더욱 친미적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 탓 저 탓 할 것 없이 내 못난 탓이다. 개천 나무래서 뭘 하나 내 눈 먼 탓을 해야지. 못난 조상 탓에 이웃나라 눈치 보는 게 몸에 뱄고 이제는 남을 의지해서 사는 게 오히려 편하게 느낄 정도가 됐으니 얼마나 한심한 국민인가. 눈물이 난다. 새 장에서 길들여진 새를 날려 보냈더니 혼자서 살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던가. 우리가 그 꼴은 아니더라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만 담겼다 하면 이러다가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에서 억눌려 살아 온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보는 심정이 되어 가슴이 아프다. 이제 한국은 옛날의 한국이 아니다. 초코렛과 껌을 얻어먹고 고마워하던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됐고 밀가루 얻어먹으며 허기를 면하던 한국도 이제는 못사는 나라의 국민을 도울 정도가 됐다. 그렇다고 신세 진 미국을 잊자는 것도 아니고 배척하자는 것도 아니다. 죽어지내는 모습에서만은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것을 반미로 몰아붙이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측은하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못 견디도록 모욕으로 느끼는 노예근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깡패들도 비굴한 놈은 더욱 팬다. 이래도 예! 저래도 예! 하면 도대체 나는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밸을 다 빼놓고 어디서 대우를 받자는 것인가. 이제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변하고 있다. 예 예 하던 시대는 끝났다. 신념을 가지고 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독도 문제와 역사왜곡 문제만 보더라도 분명해 진다. 우리는 정당한 주장을 했고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힘이 없어서 몰린 것이 아니라 옳지 않기 때문에 몰린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일 관계에서 줏대 있는 대처를 못했다. 국민이 보기에도 그저 한 번 해 보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정부의 주장을 어느 국민이 힘을 모아 뒷받침 해주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정부가 달라지니까 국민이 밀어 준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정부가 할 일이다. 안보장사라는 것이 있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안보였다. 안보만 들먹이면 찍 소리 못했다. 안보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세상에 이런 명약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 김일성 주석을 팔고 북한을 팔아 장사를 했다. 법은 잘 모르지만 적을 팔아 이득을 취했다면 이것도 '국가보안법‘위반이 아닌가. 북한의 위협을 미끼로 안보장사를 하던 쓰레기 언론이 이제는 한.미 관계를 흔들어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래서 재미를 보려는 새로운 안보장사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다. 쓰레기들이 말하는 “한.미 관계의 편 가르기”란 “미국 사람 보다 더 친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한국사람”이 있다는 대통령의 표현을 말 하는 것인 모양인데 양심이 있다는 가슴위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라. 미국인 보다 더 친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 바로 그대들이 아닌가. “죽고 사는 것은 염라대왕 손에 달렸다”는 말처럼 한국의 운명이 미국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동북아균형자론’을 헐뜯는 것도 수십년 동안 지속된 종속과 굴욕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내 나름대로 노선을 가져 보겠다는 자주적인 선언이 아닌가. 이게 얼마나 바람직한 자세인가. 그렇다면 지지와 성원은 못할망정 헐뜯고 비난을 할 수가 있는가.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을 깨는 쓰레기 언론과 과잉 친미주의자들의 억지는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주의 질서 속에서 내 살길을 내가 찾아보자는 주권국가의 생존전략을 짓밟는 행위가 아니고 뭔가. 조국은 고향과도 같다. 호마는 북풍에 울고 새는 남쪽 가지에 앉는다. 죽어도 잊지 못한다는 조국. 돌아 갈 수 있는 조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미국에서 40년을 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돌아 왔다. 친구는 말년을 지낼 집도 마련했다. 자신이 묻힐 땅도 마련했다. 왜 돌아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외국에 가서 살아 보라고... 나라를 떠나면 얼마나 조국이 그리운 줄 아느냐고. 그도 친미주의자였다. 그러나 한국을 더 사랑했다. 미국을 사랑해도 좋다. 그러나 한국을 더 사랑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이기명, 국민참여연대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