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10만원권 화폐 발행 계획을 발표하였다. 만원권을 상한으로 한 현행 지폐제도를 채택할 당시에 비해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여전히 1만원권 상한을 지킨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또 10만원권을 발행할 경우 ‘차떼기’와 같은 숨은 거래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화폐 제도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논리를 내놓았다. 나는 이런 한국은행 당국자의 변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사회 최대의 과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차떼기’로 상징되는 천문학적인 부정부패와 지하경제 척결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한국은행과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인식을 내비치고 있다. 경제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의 하나임이 분명한 한국은행이 이 정도의 무책임한 상황인식밖에 못한다는 것을 보고 서글프다는 느낌을 금할 길이 없다. 현재 10만원 고액지폐가 없어서 불편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차떼기’에 매달리는 부패한 기득권세력 이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서민들은 10만원권 대신에 대개 은행 발행의 자기앞수표를 많이 이용함으로써 불편함을 해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10만원권이 없어서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공식금융권 밖에서 ‘차떼기’와 같은 숨은 거래를 필요로 하는 사람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10만원권 발행을 구상한다는 것은 ‘차떼기’ 세력들의 편리를 도모해준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10만원 고액권 발행에 따른 국고부담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국민부담으로 이런 불필요한 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 시민운동권에서는 정치권의 검은 돈거래를 차단하고 투명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100만원 이상 정치헌금에 대해 수표 사용의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이번 고액권 발행 계획은 이런 추세에도 역행하는 처사임이 분명하다. 한국은행은 즉각 이 계획을 백지화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 한국은행은 고액권 발행 계획과 병행하여 새로운 지폐로 구권을 바꾸는 계획을 제기하였다. 이 계획은 운영방식 여하에 따라 지하경제를 투명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일정액 이상 현금을 신권으로 바꿀 경우엔 반드시 은행의 실명계좌를 거치도록 한다면 그 동안 별의별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숨겨놓았던 지하자금이 표면화될 것이다. 그리고 부정부패에 찌들어온 우리 사회를 좀 더 투명한 사회로 바꾸면서 지하자금을 산업자금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들은 과거의 부정부패로 축적한 막대한 검은 돈방석에 앉아 여전히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십만원밖에 없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진 막대한 돈이 지하에서 남몰래 움직임으로써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것들이 정치판으로 흘러들면 이들 검은 세력들이 정치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런 지하자금을 산업자금으로 유도하면 경제발전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일은 되도록 빨리 시행할 필요가 있다. 주종환/민족화합운동연합 이사장·동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