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글은 경향신문에 오늘 부터 이틀간 연재될 '조영남 방북기'의 그 첫편이다. 자칭 조영남 '연구자'인 나에게는 대단히 희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조영남은 분단과 이데올로기에 문제에 맞딱뜨려 글쓰기를 강요받은 바가 거의 없다. 실존적 휴머니스트인 조영남은 아래의 기행문에서 예의 번득이는 관찰과 인간애적 감정선의 굴곡을 보여주고 있다. 기실 내가 보는 조영남은 그야말로 '경계인'이다. 송두율이 외국에서 남북간의 경계에 섰다면, 조영남은 국내에서 이념의 경계를 줄타왔던 대표적인 무색무취의 인사다. 그의 이념정향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보일지 흥미 있게 지켜본다.) 가수 조영남(58)이 지난 5일부터 2박3일간 일정으로 평양에 다녀왔다. 류경 정주영체육관의 개관기념식 축하공연을 위한 방북이었지만 그에게는 52년 만의 귀향길이기도 했다. 늘 파격적인 언행으로 팬들을 즐겁게 하는 ‘즐거운 이단아’ 조영남이 평양에서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그가 직접 쓴 방문기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Ed 일요일 새벽. 밤새 잠을 설쳤다. 신새벽에 골프중계를 보면서 타이거 우즈와 평양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 노래 ‘내 고향 충청도’에 ‘일사후퇴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운운하는 가사가 암시하듯 나는 해방 되던 해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났다. 따지고 보면 52여년 만의 귀향길이니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6시 정각에 SBS 보도 카메라가 내 침실까지 쳐들어왔다. 평양방문 전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니 예쁜 북한처녀 손 한 번 잡는 건 애시당초 글러 보였다. 요즘 늘 신고 다니는 힐리스(바퀴달린 신발)의 끈을 조여 매면서 할머니와 딸 은지한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거라. 아빠가 못돌아오면 할머니 모시고 잘 살거라” 파주 판문각에 집합하여 임시여권을 받았다. 10가지가 넘는 서류를 작성해서 목에 하나씩 걸고 나니 평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북측 임시 출입국사무소가 설치된 휴전선. 약 5~6ｍ 거리를 두고 그어진 흰색 두 줄이 남북 경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경계인’ 송두율 교수를 여기에 모시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북측이 제공한 버스에 오르기 전 들른 간이화장실은 지구상에서 본 가장 희극적인 시설이었다. 널빤지를 V자로 파서 서서 일보는 데를 만들고, 널빤지를 사각형으로 만든 뒤 그 안을 파내서 앉아서 일을 볼 수 있게 해놨다. 이미 거기서 북한의 풍경을 다본 셈이었다. “자 그럼 인사 하갔습니다. 남남북녀라 했는데 제가 좀 못나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영앱니다” 버스에 오른 여성안내원이 조크를 던졌다. 나를 강렬한 이성으로 바라보던 리양이 “조선생님 생각보다 퍽 젊어보이십니다”라고 했다. 우리 일행들은 깜짝 놀랐다. 나는 얼떨결에 “언제 절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대답은 한결같이 “거저 다 압니다”였다. “대표곡도 알고 있어요. ‘최진사댁 셋째딸’ 아닙니까”. 나는 가느다란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시간가량을 달려 차가 멈춰 섰다. 휴게소였다. 휴게소 마당에 사방으로 간이상점을 설치하고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북한 처녀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도 팔고 음료도 팔았다. 이북산 각종 주류와 한약재, 과자, 과일 등이었다. 가격은 모두 유로화로 명시돼 있었지만 미국 달러를 유로화로 환산하여 받았다. 과자를 사서 먹었지만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내 고향 황해도 남천은 얼마나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대답하는 아가씨가 없었다. 천안 사람들한테 예산 삽교가 어디냐고 물었으면 금세 대답했을텐데 여행이 빈번치 않은 처녀들은 지명에 대해 상당히 어두운 모양이었다. 평양이 가까워지자 들판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은 특이하게도 절반 이상이 군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숨도 안쉬고 “경애하는 장군님이 착용한 옷이 유행으로 번진 겁니다”라고 답변했다. “선생은 뭘하시는 분입네까?” 내 옆에 있는 매니저한테 이영애 안내원이 물었다. 매니저라는 말을 못알아들을까봐 가수 일을 봐주고, 심부름을 해주고, 옷 들고 다니고, 옷입고 벗는 걸 도와준다고 하니까 “꼭 그래야만 합네까”하고 반문했다. 개성 근처쯤에서 땅이 하도 넓어보이기에 “땅이나 몇 평 사볼까”했더니 현대 아산 직원이 거품을 물며 좋은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현대는 공단부지 2천만평을 이미 확보해놓고 특구공단을 위한 분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할 공원들의 한 달 노임이 60달러만으로 책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오후가 돼서 아치모양의 헌정탑을 통과하여 평양시내에 들어갔다. 헌정탑에 대해서 묻자 또 안내원은 “경애하는 수령님께서…”운운하며 좔좔좔 얘기했다. 평양을 가로지르는 통일거리는 광화문 네거리보다 두 배 정도 넓고 시원하게 뚫려 있어 부러웠다. 아 비좁은 서울거리의 자동차를 딱 반만 실어다가 평양거리에 풀어놨으면…. 평양시내의 그 유명한 고려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복도에서 사흘 먼저온 SBS의 아는 작가를 만났는데 첫마디부터가 푸념이다. “형님 저 돌겠습니다. 며칠째 김상배의 ‘몇 미터 앞에다 두고’를 불렀어요. 여기서 평양역까지 500ｍ도 안되는데 거기라도 가볼까 하면 북측 감시원이 나타나 ‘어델 가십니까’하는 거예요. ‘구경 갑니다’하면 ‘타협 안됐습니다’ 합니다. 정말 타협땜에 말라죽겠어요” 밋밋한 한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호텔 앞에 나갔다. 나는 북한동포들 앞에서 힐리스 신발을 곧추세우고 멋진 묘기를 선보였다. 단언하건대 나는 내 얼굴(?)이나 가창력으로 북한 처녀들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다만 신기한 힐리스 신발 하나로 방북연예인 중 최고 인기를 누렸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저녁이 돼서야 호텔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류경 정주영체육관으로 공연연습을 위해 이동했다. 북측 공연단과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의 ‘열린 음악회’ 리허설 현장과 다를 바 없었다. 밤의 평양은 암흑 천지.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로비에 있는 바와 지하 가라오케가 전부였다. 다행히 바에서 여종업원 김향미양과 만났다. 내가 북녘땅에서 처음 만난 예쁘고 상냥한 여성이었다. 물론 다음날 저녁에 그 장소에서 향미양보다 더 예쁘고 상냥한 여자동무를 접선한 뒤 생각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운운하는 TV를 보면서 잠이 들었다. 타이거우즈와 김정일 지도자의 거리를 생각하면서…. 최종 편집: 2003년 10월 09일 18: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