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경향신문의 오늘자 '시론'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명확한 문제의식에 기초해 힘있게 쓰여진 좋은 글이군요. 함께 생각해보시죠.) 파병 논의를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은 외교가 없는 나라다. 모든 정책이 다 그렇지만, 외교정책도 결정 과정이 있다. 현재 상황은 한·미관계, 북한 핵문제, 그리고 국민 여론 등 파병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들을 검토하는 단계다. 노무현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익 고려한 ‘파병’ 협상력 부재 직무에 충실하지 않은 관료가 너무 많다. 외교관은 한국의 당면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미국에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만 주한 미국 대사관이 할 일을 주미 한국 대사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 국방부는 어떤가? 이라크 현지 조사단은 말 그대로 현지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닌가? 유엔 사무소는 이라크 북부지역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구체적인 근거를 갖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우리 조사단은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않고 상황이 안정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은 없고, 의견만 있다. 그 정도는 현지에 가보지 않고도 작성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은 파병관련 법안을 통과하고도 10여차례의 조사단을 파견하여 평화 유지에 적합한 상황인지를 점검하고 있다. 다시 조사단을 파견해야 하는 이 상황에 대해 분명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외교정책을 이런 식으로 결정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한·미관계에서 앞으로도 많은 중요한 협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관료들이 한·미관계를 외교적 협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주권 국가인가? 정책결정 과정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국민적 동의를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외교는 협상 상대자와의 관계와 국민 여론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노련한 외교관이 어려운 협상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제안을 받고 싶지만, 우리 국민을 납득시킬 자신이 없다”. 그것이 민주 국가의 외교 협상력이다. 국내 여론을 활용하기는커녕, 협상 상대자를 대신하여 근거도 없는 논리로 국민들을 설득하려 한다면 협상력은 없다. 그렇게 되면, 상대 국가는 우리를 외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들은 많이 하는데, 관료들은 스스로 국익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정치도 없다. 외교적 협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여론이고,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정치권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정치는 무얼 하고 있나? 여전히 색깔론으로 날을 새우고 있다. ‘송두율 사건’은 사법기관이 처리할 문제다. 밝혀져야 할 일이 있으면 밝혀야 하고, 그런 다음 본인의 반성과 대한민국 법이 허용하는 포용성, 그리고 관련 사건들의 전례를 고려하여 사법적 판단을 하면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집권야당은 모든 문제를 사상검증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본다. 최소한의 상식을 지켰으면 좋겠다. 송두율 교수가 내재적 접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NSC의 이종석 박사도 그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친북 성향이란다.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내재적 인식방법은 송두율 교수가 정확히 인용했지만, 위대한 철학자인 칸트가 사용한 단어다. 이미 200년 전에 사망한 철학자 칸트가 친북 성향이라니. 한나라당은 매카시즘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그보다 더한 것이 아닌가? 참고로 이종석 박사는 분명히 송두율 교수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내재적 비판적 접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과 유일체제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학자다. 그를 친북 성향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 하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사상의 소유자들인가? 지난번 ‘서동만 사태’에서도 그랬지만, 최소한 의혹을 제기하기 전에 관련 논문이라도 한번 읽어 보았으면 한다. 정치권은 색깔론으로 날 지새 일부 정부 관료들은 외교를 포기하고, 집권 야당은 정치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정책이란 보수나 진보가 따로 없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정책의 결과를 두려워하기 전에, 최소한 합리적인 정책결정 과정을 충실히 밟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은 국민의 대표다. 정치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면, 갈등이 증폭되고 혼란이 커진다. 다수당은 다수 국민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대한민국에서는 왜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가? 〈김연철/고대 아세아문제硏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