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미디어면을 담당하는 종합기획부 김상철 기자입니다. 국제언론인협회(IPI)라는 국제단체가 국내 언론상황을 거론하면서 정치권과 언론계가 시끄럽습니다. IPI는 9월 13~16일 열린 제52차 연례총회에서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하면서 국내 언론상황을 우려하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한국을 `언론자유탄압 감시대상국(Watch List)`에 남겨두기로 결정했습니다. IPI는 주로 언론사 대표나 간부들이 회원으로 있는 단체입니다. 19일자 경향신문 미디어면에서도 다루었지만 국내 언론상황에 대한 IPI의 편협한 시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닙니다. 이번에 채택한 결의문을 보면 “대통령의 `비판언론`에 대한 비난 발언 직후 공정거래위원회가 신문시장 조사에 나선 것은 정부가 `비판언론`을 공격하려 한다는 증거다“ “이같은 공정위 조사는 김대중 정권의 세무조사와 매우 비슷하다“고 규정한 대목이 나옵니다. IPI가 문제삼은 노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8월2일 국정토론회 석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공정위는 이미 6월25일 신문시장 실태조사 방침을 밝혔고(당시 보도도 다 됐었죠) 조사기관과 계약을 체결한 건 7월31일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맞지 않습니다. 세무조사도 그렇습니다. IPI는 언론사 세무조사와 사주 구속이 이어졌던 2001년, 한국을 `Watch List`에 올려놓았습니다. 언론계 안팎의 논란이 첨예했던 이때도 IPI는 줄곧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 죽이기`라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해 9월 IPI는 현지 상황을 조사하겠다며 세계신문협회(WAN)와 공동으로 꾸린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방한 다음날 곧바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주 이사회를 열어 한국을 `Watch List`에 포함시켰다“고 발표해 취재하던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상 조사를 하러 왔다면서 이미 `Watch List`에 포함시켰다니요? 이 때문에 기자들로부터 `사전 각본에 의한 조사`라는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IPI는 왜 이토록 일관되게 편협한 시각, 혹은 언론계 특정 진영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는 걸까요. IPI가 국내 언론에 등장한 양상을 되짚으면 답이 보입니다. IPI가 과거 직접적인 통제와 간섭, 언론인 강제해직이 횡행하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별다른 성명도 없었고 `한국의 언론자유에 별 문제 없다`는 식의 시각을 보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까지 국내 언론도 IPI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뉴스 검색사이트인 카인즈(www.kinds.or.kr)를 통해 중앙일간지의 IPI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면 90년부터 98년까지는 1년에 20~50건 정도가 보도됐습니다. `IPI 총회가 열린다` `한국에서는 누가 참석한다`는 식의 단신이 대부분이었죠(95년에는 서울에서 총회가 열렸기 때문에 190여건의 기사가 검색됩니다). 그런데 IPI 관련 기사량은 99년과 2001년 각각 130여건, 300여건 등으로 솟구칩니다. 99년에는 보광그룹 세무조사로 당시 대주주인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구속됐고, 2001년 역시 언론사 세무조사와 동아일보 김병관 전회장,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구속 등이 이어졌습니다. 이 시점부터 활발하게 개진되고 조명받기 시작한 IPI의 입장은 똑같습니다. `비판언론 죽이기` `언론탄압`이라는 겁니다. 세무조사로 대표나 사주가 구속된 신문사들의 입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99년 10월 국감 당시 국민회의 최재승 의원은 “중앙일보가 항의 서한을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IPI 사무총장에게 보냈고 IPI는 중앙일보 주장을 근거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했다“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IPI 창구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위원회의 경우 93년부터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IPI가 어떤 경로로 언론상황을 취재하고 파악하는 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안팎의 정황을 보면 국내 언론에 대한 IPI의 관심이 최근 들어 갑작스레 높아졌다기보다 몇몇 언론을 중심으로 IPI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정부와 대척점에 섰던 언론사들이 탈세 혐의에 따른 사주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국제여론`을 등에 업는 새로운 방도를 찾아낸 거죠. IPI가 지난 4월 발표한 한국 언론상황 관련 보고서 역시 신문방송편집인협회와 한나라당 주장, 조선일보 칼럼 등을 바탕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이번 IPI 결의문을 놓고서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사설을 비롯해 주요 기사로 처리했고 한나라당도 `국제적 망신`이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사실, 자기들이 했던 말과 주장이 그대로 되풀이된 것일 뿐입니다. 중간에 한 국제언론단체의 입을 거친 것이라는 점을 빼면요. `원산지`는 한국의 특정 집단이고 `메이커`가 IPI라고나 할까요. 앞으로라도 너무 호들갑 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03년 09월 19일17:02                  (김상철 기자 ksoul@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