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점령은 많은 나라들의 다양한 테러집단들에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울 공동의 전장을 제공한 꼴이 됐다.” 미국 국가안보회의 핵테러 대책 책임자를 지낸 제시카 스턴의 지적대로 이라크에서는 지난 5월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의기양양했던 전투종결 선언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은 이른바 ‘민주화 도미노’론을 역설했다. “미국이 군사력으로 이라크를 민주화하면 중동 전역에 도미노처럼 민주화가 퍼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 오히려 이라크 정세가 악화돼 불안정화할 경우 그 주변지역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체제까지 흔들리지 않을까 그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 파장은 중동에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한쪽에서 베트남전보다 더 심각한 후유증을 경고하고 있는 것도 이 ‘역도미노’를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시 정권이 한때 백안시했던 프랑스, 독일 등에까지 손을 벌리며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은 네오콘들의 정책 실패와 미국 힘의 한계를 절감한 결과다. 프랑스 독일이 이라크 주권의 조기 이양을 앞세우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약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동재편의 과실을 독식하려는 미국의 이런 처지를 저울질하며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국제 협조로 포장될 그들의 공동대응 강도는 미국의 힘과 오만의 세기에 반비례할 것이다. 유엔은 어차피 들러리다. 일본은 어떤가. 지난 17일 하워드 베이커 주일 미국대사는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상을 찾아가 이라크 지원 자금을 처음으로 공식 요청하고 자위대의 조기 파병을 촉구했다. 10월23일부터 스페인에서 열릴 이라크재건 지원국회의 1주일 전에 부시 대통령이 직접 도쿄에 가기로 한 것도 정세가 다급해졌기 때문이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은 앞으로 몇 해 동안 군사비 등을 빼고 이라크 재건작업에 들어갈 자금규모를 600억~700억달러로 예상한다. 이 가운데 300억~550억달러는 미국 아닌 외국 지원금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돈 거두기가 쉽지 않다. 유럽연합이 제시한 것은 10억달러 정도다. 걸프전 때 140억달러를 낸 일본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총 60억~110억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환율문제가 부각됐지만 지난 20일의 주요 7국(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도 이 자금분담 문제가 논의됐을 가능성이 높다. 2000년의 ‘아미티지 보고서’는 “미-일 관계를 미-영 동맹 수준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장은 최근 “동아시아 안정은 미-일, 미-중, 중-일의 삼각형이 좌우한다. 그러나 그 삼각형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는 미-일이고, 미-일이 안정의 기초”라고 특유의 일본 중시론을 또다시 꺼냈다. “세계의 핵심지역들을 적대세력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한 2001년 9월 부시 행정부의 국방정책검토(QDR)나 2002년 연례 국방보고서 등도 같은 맥락에 있다. 22일 확정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2차 내각에는 미국의 이런 아시아 전략의 적극 동조자들이 대거 포진했다. 미국과 그들이 한반도 분단선을 제일선으로 삼고 있는 동아시아 해양-대륙 세력의 대분단·대립구조의 수혜자요 설계자이며, 이제 그 구도를 전지구적 전략으로까지 유지·확장하려 하고 있다는 분석은 새삼스러울 게 없게 됐다. 민족통일 문제도 거기에 달렸다. 지금의 구조 속에서 한-미 동맹은 철두철미 미-일 동맹의 구상에 봉사하는 그 하위 종속체제다. 파병 요청을 받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타이, 터키, 폴란드도 대국들의 게임판 위에 놓인 졸들이다. 한국도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는 곧잘 ‘국익’이란 화두가 등장한다. 우리가 그런 그들의 구도를 또다시 따를 것인지도 국익에 직결된다. 무엇이 진짜 국익일까. 한승동 국제부장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