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경향신문 박성휴 기자의 재미있는 글입니다. 함께 즐감하시죠) <기원전 요르단의 검문소 앞> 보초 : (행인1을 세워놓고는) 너, ‘쉬볼렛(shibboleth)’ 해봐. 행인1 : 쉬볼렛. 보초 : 통과! 보초 : (행인2를 세운뒤) 너도 ‘쉬볼렛(shibboleth)’ 해봐. 행인2 : 씨볼렛(sibboleth). 보초 : 너 잠깐 일루 와봐. (행인2는 끌려간 뒤 살해됐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경구 하나쯤은 어느 사회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라는 말이 있죠. 그러나 위의 경우처럼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횡사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shibboleth’ 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특정 종족이나 집단, 계급 등을 특징짓는 말’ 로 나와 있습니다. ‘shibboleth’ 은 원래 ‘곡물의 이삭’ 을 의미하는 고대 히브리어의 사투리라고 하네요. 이 단어는 성서 속의 사사기(Judges) 12장에 나오는 바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대충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기원전 중동지역에서는 종족간 다툼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길르앗(Gileadites) 종족의 종교 지도자 입다(Jephthah)는 에프라임(Ephraimites) 종족과 전쟁을 벌여 이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런데 패배한 에프라임 종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이들을 처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족들은 에프라임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목인 요르단에 초소를 세웠답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너, 에프라임 사람이지?”라고 물었죠. 그런데 하나같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니 구분해 낼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shibboleth’ 이었습니다. 에프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과 달리 ‘sh’ 발음을 못한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에프라임 출신이라는 것이 들통나 죽임을 당한 사람이 무려 4만2천명이나 된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shibboleth’ 을 적용한다면 각 지역 사람들을 쉽게 구분해 내는 단어들이 많을 겁니다. 머나먼 땅에서 아주 오래 전 있었던 일을 왜 꺼내는지 궁금해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생사를 가름하는 shibboleth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저는 단연코 ‘어메리카(America)’라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제가 요즘 국제사회의 풍경을 재구성, 조금 희화화해 본 겁니다. 미국: (A나라에 대해) ‘어메리카(America)’ 해봐. A : (두려움에 떨며, 또는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으며) 어메리카(America)! 미국: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넌 내 친구야. 미국: (B나라에 대해) ‘어메리카(America)’ 해봐. B : (바짝 긴장하며, 또는 당당하게) 워메리카(Warmerica)! 미국: (주먹을 휘두르며) 적이닷! 2001년 9·11테러를 당한 뒤 미국은 살기가 등등해졌습니다. 세계를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가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지난해와 올해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면서 전세계 국가들에게 찬반을 물었습니다. 희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누구냐”고 물은 거지요. 많은 나라들이 이라크전쟁의 불합리함을 잘 알면서도 미국의 서슬퍼런 기세에 눌려 ‘America(=전쟁 찬성)’ 를 큰 소리로 복창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일부 국가들은 ‘Warmerica(=전쟁 반대)’ 를 외쳤습니다. ‘워메리카(Warmerica)’ 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전쟁(War)’ 과 ‘미국(America)’ 의 합성어로 제가 어쭙잖게 한번 만들어 본 말입니다. 무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비판하는 말로 여겨주시면 되겠습니다. 부시 정부의 편가르기는 전쟁이 끝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러시아는 용서하고 독일은 무시하며 프랑스는 반드시 벌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은 그동안 계속 ‘어메리카’ 를 외쳐왔고 북한은 `워메리카`를 부르짖어 온 형국입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의 맹방을 넘어 혈맹으로까지 자처하던 한국이 요즘 묘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워메리카’ 의 함성이 드높더니 급기야는 앞으로 감행해야 할지도 모르는 북한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여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어메리카’ 와 ‘워메리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줄기차게 외치는 것에 반대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번 방미에서 ‘어메리카’ 를 크게 외치고 돌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대미 저자세 외교’ 를 지적하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런 비판에는 맞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용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와 독일도 미국과의 갈등을 어떻게 풀까 노심초사하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그런 나라들보다 훨씬 힘이 약하고, 미국이 우리를 제재할 수 있는 방편이 엄청 많고, 그런 제재가 이뤄질 경우 우리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미국이 이런 저런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는 말만 새어 나와도 당장 국제 자본이 한국에서 계속 머물 것인가를 고민할 겁니다.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확실하게 ‘어메리카’ 를 외치는 것에 힘입어 국제시장에 진입, 그나마 지금같은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죠. 그래서 저는 노대통령과 외교관들이 ‘어메리카’ 와 ‘워메리카’ 를 적절히 섞어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북핵문제에서도 미국의 입장을 많이 반영하는 것처럼 하다가도 우리 민족의 생존이 걸린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호하게 미국에 ‘노’ 라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지요. 하지만 외교관이 아닌 우리 일반 국민들은 미국의 본질을, 특히 부시 행정부의 본질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바른 소리를 낼 때 우리 외교관들은 미국에게 “우리 국민들의 여론 때문에 당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기가 대단히 힘들다”며 버틸 여지가 있는 거죠. 어쨌거나 지금 미국의 행태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구석이 많습니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제국주의적이죠. 제국주의라는 말이 나온 김에 좀더 말씀드리면 지금 미국에서는 ‘미국이 제국주의가 돼야 한다’ 는 강경한 주장이 워싱턴을 쥐고 흔드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며 좋은 제국주의도 있다는 거지요. 그 얘기는 다음에 한번 할까 생각 중입니다. 〈박성휴 기자 songhu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