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대학신문〉 학생기자 시절 ‘고바우’로 유명한 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에게 30년 뒤 서울대생 모습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다. 창간 특집호인지라 대형 화폭에 해당하는 신문 양면이 주어졌는데, 그가 그려온 것 가운데 문리대생 편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인물들이 고관대작과 빈털터리 거지 모습으로 대별됐기 때문이다. 구구한 해석들이 오간 끝에 한 학생기자가 이 그림은 필시 졸업생들이 출세파와 현실 개조파로 갈리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라고 해석해 모두 동의했다. 그림처럼 현실 개조파는 그 주력이 한 세대가 지난 오늘 진보학계와 운동권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고, 출세파는 현실 권력을 찾아 뿔뿔이 떠났다. 그러나 지금처럼 완전히 출세파가 압도하는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서울대가 대도시 출신 중류가정 이상 자녀의 출세를 위한 발판 정도로 전락했다는 심각한 비판에 새삼 시달리고 있다. 민주화도 많이 됐고 학생들 의식도 달라졌다는데 무언들 못할까마는, 이른바 고등교육의 향도임을 자임하는 서울대에서조차 교육이 더는 부의 세습을 막고 기득권 재생산 고리를 끊는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판단이 많다. 사실이라면 이는 대학교육의 총체적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다. 최근 서울대 신입생들을 조사한 결과, 의대와 경영대·법대생이 자신을 상류층 신분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통계가 나오고, 도서관이 고시 준비생들로 넘쳐나는 현실을 보면, 서울대가 분명 제자리를 못 잡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물론, 서울대가 ‘출세를 위한 대학’이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른바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 파동’이라는 원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게 가혹하지만 내 원초적 분석이다.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지만 결국 ‘학문을 하는 대학’과 ‘취업을 준비시키는 전문학교’들이 멋대로 강제 통합된 것이 오늘 사태의 원조라고 판단된다. 서울대는 미군정 이래 지금까지 통치집단의 유능한 관료 배출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학문 연마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이 반 몫을 당시 학생들이 해냈다고 자부한다. 덕분에 학문파와 출세파가 엇비슷하게 세력 균형을 이루었던 것이다. 내가 다닌 문리대 예를 들면, 지금 공무원이 된 친구들에게 괴로운 기억일테지만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감히 도서관에 드나들 수 없었다. 눈치 때문에 육법전서를 펴 놓고 읽지 못해 겉을 싸야 했다. 테니스채를 들고 다닌 학생들도 학생회 예산을 타는 것은 꿈도 안 꿨다. 돌이켜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이런 지독한 교조주의도 있었다. 관악산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사회대 건물인 6동의 화장실이 박살난 적이 있었다. ‘양변기에서 수정주의가 나온다’나 어쩐다나. 학생들이 망치를 들고 양변기를 죄다 부수어 버린 것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대학은, 위르겐 하버마스 말을 빌리자면, 오로지 ‘해방적 관점’과 ‘비판적 지식’ 추구에 임무가 엄격히 한정돼 있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지역균형 선발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해 일부 찬반논쟁이 일고 있다. 학생 선발 방식을 다변화하는 것은 대학의 다양한 상상력 계발과 창의성 발휘에 보탬이 된다는 그 구상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빈칸을 채우는 식’의 입시 교육만으로 고도의 지식기반 사회에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취임 한돌을 맞은 정 총장이 자신감이 붙었는지 개혁의 화두를 잇달아 던지고 있다. “‘미, 투(나도)’ 주의는 안된다” “서열철폐 주장은 포퓰리즘”이라는 발언 뒤 그가 감춘 개혁의 큰 그림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서울대 개혁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단순히 ‘출세 인증’을 받는 곳에서 탈피해 ‘자생적 학문 축적 기반을 갖춘 대학’으로 올곧게 거듭날 수 있다. 기득권 포기는 선도 대학으로서 갖고 있어서는 안 될, 기본 학문을 뺀 나머지 부문을 과감하고 늠연하게 떼내는 것이다. 김형배 논설위원 hbk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