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결코 악덕만은 아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오히려 예찬한다. 게으름을 찬양하는 책까지 남겼다. 철학만이 아니다. 현대과학도 게으름을 당당하게 권한다. 게으름을 피워야 오래 산단다.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쉼의 뜻은 더 절절하다. 여름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까닭이다. 실제로 휴가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래서다. 국무위원들도 마땅히 휴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더구나 쉬면서 뜻있는 구상을 한다면 좋은 일이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성’을 상징하는 강금실 법무와 김두관 행자부 장관의 휴가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모든 장관들이 휴가를 가지 않거나 사흘 안쪽으로 보낸 것과 달리 일주일을 쉬겠다는 것도 ‘깊은 뜻’이 있을 터이다. 강 장관의 ‘파격’에 힘입어 차관도 장관이 돌아온 바로 다음 주에 휴가를 냈다. 김 장관도 당당하게 휴가 일정을 밝히며 공무원들을 독려하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하지만 남우세스럽더라도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개혁 장관’들이 휴가를 마치 ‘신선한 발상’인 듯 내세울 때, 정작 휴가철과 방학을 맞은 노동자들과 젊은 지성인들은 줄줄이 감옥에 갇히고 있지 않은가. 시민사회가 한총련의 합법화와 수배 해제를 애면글면 촉구했지만 경찰의 연행은 언죽번죽 더 늘어났다. 올 들어 벌써 30여명에 이른다. 최근 보름새 5·18 묘소 앞 시위를 주도한 광주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10명의 학생을 잡아갔다. 학생들만이 아니다. 파업을 푼 철도 노동자들을 향한 칼바람도 매섭다. ‘불법 파업’을 이유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전국철도노조 위원장과 사무처장 등 6명을 기어이 구속했다. 자진해서 조사받으러 간 전교조 위원장까지 감옥에 가뒀다. 그뿐인가. 곳곳에서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하는 민중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바보 노무현’을 사랑한 민중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을 닦아줘야 할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참여 정부’ 국무위원들의 휴가 행렬에 ‘참여’한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다음달 초 가족들과 ‘조촐한 휴가’를 간다고 밝혔다. 이미 노 대통령은 지난 5월에도 휴가를 가며 ‘국정 구상’과 ‘독서 삼매경’을 밝힌 바 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휴가지에는 골프장도 있어 권양숙 여사와 함께 가볍게 라운딩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새퉁스런 일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남북 공동선언 3주년이던 6월15일에도 아무런 기념 행사 없이 빗속에 골프를 즐겼다. 공교롭게도 그날 청와대에 ‘벼락’이 떨어졌다. 인터넷에는 “하늘이 노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취임 초기에 일찌감치 “위축된 소비 진작을 위해 골프를 친” 대통령이 방명록에 남긴 글도 더없이 인상적이다. “넉넉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한시름 털고 갑니다.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그의 지지도는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71%(3월), 57%(5월), 40%(7월)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왜 그럴까. 개혁은 지지부진하면서 곰비임비 실망감만 주고 있어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조차 않은 채 모든 걸 국회 탓으로 돌린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 정권에 똑같은 비판을 되풀이하기란 언론인으로서 갑갑한 노릇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산처럼 쌓인 개혁과제를 싸목싸목 풀어 가는 데 5년은 넉넉하지 않다. 조급해서도 안 되지만 게으름을 피울 때는 더더욱 아니다. 러셀이 게으름을 예찬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현대 문명은 품삯을 깎거나 실업자 없이 하루 4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통찰이 깔려 있다. 오늘 노 정권의 ‘철학’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 경찰력을 투입하고, 파업을 푼 노동자와 대학생들을 굴비엮듯 잡아가면서 생뚱맞게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부르대는 풍경은 가관이다. 노 대통령과 강 장관·김 장관이 쓴소리를 들을 귀가 없다면 본인의 불행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여, 단호하게 경고한다. 지금 이 순간 노 정권에게 게으름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민중을 배신하는 악덕이다.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