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19일, 2580보도] ⊙ 이상호 기자  : 혹시 집안의 족보가 위조됐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느 날 자식의 성화에 못 이겨 뿌리 찾기에 나선 한 아주머니는 자기 문중 사람들이 조상들의 묘를 자꾸 없애는 이상한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문중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을 텐데'하는 의심에서 시작한 한 아주머니의 족보전쟁,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법원에 오가기까지 10여 년 세월 동안 거대 문중과 홀로 맞서 싸워온 온양 정씨 종갓집 맏며느리 장금자씨의 족보전쟁을 추적했습니다. 영상편집 김상진 / 영상취재 함상호 / AD 공아영   경기도 하남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91살 김재동 할아버지, 서 있기조차 힘들어 뵈는 할아버지가 마을 뒷산에 애국지사의 묘가 있다며 취재진을 이끕니다. - 오시려면 힘드시겠어요? - 내가 자기네들 아니면 내가 여기 안 와. 도로 가 버리지... 길도 없는 산 속을 한참 헤맨 끝에 할아버지는 잡초가 우거진 무덤으로 취재진을 안내합니다. - 여기가 할아버지 묘소지. 여기 묘자리 있잖아. 상석도 있고,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네 아니면 안 와. 글씨가 여기 있었는데 앞에, 있었는데 없어. - 닳아졌네요? 누가 지운 거예요? - 먼저 있었는데, 없어졌어. 무덤의 주인은 구한말 의금부도사를 지낸 정슬교, 그는 충정공 민영환의 스승이었습니다. 충정공 민영환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해 자결하기 사흘 전 스승 슬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정슬교는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뵙고 오라며 거사를 응원했습니다. 정슬교는 제자의 거사 이후 식음을 끊고 유생들의 궐기를 촉구했습니다. 뒷날 그의 영향을 받은 장손 정화영 3·1운동 직후 집에서 폭탄을 터뜨려 자결합니다. 이곳이 바로 의금부도사 정슬교의 집터가 있던 곳입니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정슬교의 가족을 모두 이곳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울 중구청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엔 비운의 역사를 증언하는 단 한 조각의 비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전국으로 흩어진 정슬교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기도 일산에 사는 장금자씨, 일찍이 남편을 잃고 세 자녀를 키워온 장씨는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조상에 대한 질문에 시달리게 됩니다. ⊙ 정영훈  : 예전에 친구들끼리 너 양반이다, 나 쌍놈이다, 그런 얘기 많이 했었잖아요. 그래서 그때는 진짜 우리 파가 어디고 씨족이 어디고 그런 거를 알고 싶은 그런 마음밖에 없었죠. 자녀들의 뿌리 찾기에 나선 장금자씨는 마침내 자신이 정슬교의  3대 종부이며 아들은 4대 종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조상을 찾은 기쁨도 잠시, 이들 모자의 뿌리 찾기는 그러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굴절되고 있었습니다. 온양 정씨 선조 묘소 수십 기가 있던 천안시 백석동 일대입니다. 종합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온양 정씨 몇 몇 사람들이 서둘러 문중을 구성해 토지보상금 수 십억 원을 타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머지 19기에 대해서는 자기 조상 묘가 아니라며 무연분묘를 처리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천안시청 직원  : 무연... 많았는데요. 거기가 온양 정씨 집안... 그걸 자기들이 다 이전 해 갖고 무연분묘가 있었는데 그거는 우리가 공분 해 가지고 이전했고요. - 무연분묘가 몇 개나 됐어요? 그때? 그때 한 10 몇 개 됐을 거예요. 10 대 여섯 개. - 그거는 어떻게 했어요? 그거는 중종에서 자기들 묘가 아니다, 그렇게... 그렇죠. 소유자가 파악이 안 돼 있는 거. 조상의 뿌리를 찾던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된 장금자씨는 더 이상 조상 묘에 대한 훼손을 막아달라고 천안시에 요청했고 천안시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장금자 / 온양 정氏 종부(宗婦)  : 이 집에 애들 엄마인데 애들이 조상을 그렇게 뻔히... 없앤 걸 알면서 제가 그 일을 안 하면은 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내가 안 하면은 내가 죽어서 내가 제일 무섭더라고... 결국 종합운동장은 부지 한복판에 묘지와 자연녹지를 갖춘 이색적인 운동장으로 남게 됐습니다. 150억 원대의 온양 정씨 땅이 수용된 천안시 쌍용동 일대입니다. 이곳에서도 토지 보상금을 받고 마구 조상 묘들이 파헤쳐졌습니다. ⊙ 황주현 / 천안시 쌍용동 (73세)  : 파갔지요 들... 정씨네가. - 파갔어요? 그럼, 다 파다가 다 묻어놨지. - 어디다가요? 어디다 묻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걸. 모르지 나는... 파 가는 건 알았지. 그러는 사이 일부 언론을 통해 토지보상금 중 일부가 해당 문중의 정치인에게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중은 불과 8천만 원을 꿔준 것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 정문영 / 해당 문중 총무  : 시공 얘기가 거론이 돼 갖고 우리도 검찰조사를 한번 받았던 적이 있었어요. 먼저 선거해서 선거를 지원을 해줘야 한다, 그쪽에서 요청이 왔었어요. 근데 이거는 중죄이기 때문에 이거 누가 개인이 우리 자연이 봐서는 명예를 위해서는 도와줘야 된다 그러지만 그거는 할 수가 없다 해 갖고는 채무형식으로 한번 해준 적은 있었어요. 사라진 무덤들을 확인하던 장금자씨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남의 무덤이라며 없앤 산소는 하나 같이 종갓집인 장금자씨와 그 인근 후손들로 이어지는 조상들의 것인 반면 현재 문중을 이끌고 있는 쪽의 선조들의 묘소는 모두 보존돼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온양 정씨 후손이 아닌 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장씨가 찾아간 곳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신문화연구원 측은 현존하는 온양 정씨의 여섯 가지 족보를 구해서 정밀분석작업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1923년 이후에 만들어진 족보는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김동주 전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어느 족보든지 보면은 다 일맥상통하거든요. 일맥상통하는데 이건 일맥상통이 안 해요. 어딘가 맞춰보면 뭐가 자꾸 이렇게 맞지 않고... ⊙ 조기대 / 당시 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  : 사망은 했는데 그 이후에 아들이 생긴 사람, 이런 경우가 많았고요. 또 나이가 많은 사람이 8∼90된 사람이 또 아들을 낳은 걸로 이렇게 된 점이...   정신문화연구원의 감정결과입니다. 온양 정씨의 종손과 인근은 후손이 모두 제대로 이어져온 반면 이쪽을 보면은 후손이 없어서 모두 이렇게 대가 끊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23년 족보에 갑자기 어디선가 50명이 무더기로 이렇게 끼어 들어왔고 이들의 자손이 현재의 문중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문화연구원 측은 이 같은 감정결과를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법원은 그러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끼어 들었다고 해도 족보는 족보라며 감정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자 문중사람들의 반격이 시작됐음은 물론입니다. 족보감정위원을 고소하는가 하면 문중소속 국회의원을 앞세워 정신문화연구원을 항의방문하기도 했습니다. ⊙ 김동주 전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정당한 걸 해주고서도 그렇게 곤욕을 치르는 이런 세상이... 그리고 심지어 연구원장한테도 여러 가지... 나 갖은 사람 쫓아내라고 하는 둥 이렇게 별 놈 다 오고 한 모양이에요. 특히 장금자씨는 문중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장씨가 조상 찾기를 빙자해서 자신들에게 돈을 요구했다는 소문까지 퍼뜨렸습니다. ⊙ 문중 관계자  : 장금자가 검사들 아는 애들 있으니까 사돈의 팔촌이 있으니까, 그런 애들 있으니까 자기가 은행지점장도 자기가 아는 애들 이리 저리 다 끌어 가지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으니까, 우리한테. 그런가 하면 문중의 토지문서를 훔쳐갔다는 등의 혐의로 수 차례 고소해 오기도 했습니다. ⊙ 장금자 / 온양 정氏·종부(宗婦)  : 증거까지 다 있는데도 그걸 내 말 안 믿어 주고 그냥 저를 몰아붙일 때 정말 이 땅에 살고 싶지 않았어요. 자식이 없고 이 일이 없었다면... 근데 그럴수록 더 힘이 나더라고요. 그랬어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고 정말 서러웠어요. 사라져 가는 조상의 묘를 지켜야겠다며 장씨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문제가 된 문중사람들의 호적을 일일이 족보와 대조해보는 것이었습니다. 5년여에 걸친 자료수집 결과 장금자씨는 그들이 호적을 변조해 끼어 들어온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장씨는 호적정정신청을 냈고 천안지원은 8개월 만인 지난 달 직권으로 이들의 호적말소를 결정했습니다. 한상곤 판사는 1923년 족보를 만든 당사자는 물론 문제의 문중을 주도한 사람들이 호적을 옮기는 과정에 명백하게 잘못 끼어 들어왔다고 밝혔습니다. - 지금 현재 있는 호적에서 나가야 되는데, 그러면 이 아래 있는 사람들도 다 함께 나가나? ⊙ 천안지원 호적계장  : 그 뿌리들은 다 나가야겠죠. 전라도에 만들던 경상도에 만들던 천안에 만들던 내 호적 이렇게 없어졌으니까 새로 만들어 주쇼 하고 법원에다가 취적 신청을 해야 한다. 이례적인 법원 결정에 해당 면사무소도 놀랍다는 눈치입니다.   ⊙ 서진경 / 총무계장·천안시 광덕면  : 저도 이런 건 처음 겪었고 그 분 말이 그렇다고 그러더라고... 법원에서도 대한민국에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거라고 감사뿐만이 아니고 이 서류 찾고 하느라고 아산시하고 천안시는 발칵 뒤집힐 만큼 5년 동안 재판을 판을 했다면... 1, 2년도 아니고 알아보는 거 아니에요. 얼마나 담당자들이 골치 아팠겠나... 취재가 진행되자 해당 문중대표들은 단체로 2580 찾아와서 장금자씨를 성토했습니다. - 남의 호적을 가지고 자꾸 거론을 하다 보니까 반발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호적은 어디까지나 법원 측에서 거론해야지, 개인의 호적을 장금자가 누구네 호적이 나쁘다, 잘됐다고 해서 거론하고 침범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난 이런 얘기... - 이 호적이라고 하는 것이 중간에서 생겼기 때문에 만들어도 넣고 이렇게 해서 그냥 끼어 맞춰서 남자가 여자도 되고 여자가 남자도 되고 이랬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의 호적 정정 결정이 내려진 만큼 10년을 끌어온 온양 정씨 족보분쟁은 곧 마무리 될 것으로 보입니다. ⊙ 이병태 / 문중분쟁 전문가  : 지금 이 사건은 현재 진짜 족보와 가짜 족보를 놓고 어느 사람들이 진짜이냐를 놓고 여태까지 따져 왔던 부분인데 진짜 족보에서 끼어 들어왔다고 하는 사람들 자체가 전부다 호적이 위조됐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짜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는 얘기죠. 장금자씨는 지난 주 모처럼 세 자녀와 함께 남편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무심한 남편 앞에서니 지난 10여 년 홀로 싸워온 세월에 서러움이 자꾸만 복받쳐 오릅니다. - 모든 일 다 알고 있죠? 지금 다 밝혀지고 있어요. 사필귀정이라고 합디다. 참 무심한 양반, 그렇게 무심할 수가...   지나온 세월 그 고통을 놓아버리고 이젠 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장금자씨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라진 조상들의 묘를 한 데 모으고 문중의 전통성을 바로 세울 책임이 바로 그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리한 족보전쟁, 장씨의 뿌리 찾기는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을 뿐입니다. (주) 10년전 이미 끝났어야 할 이 사건. 하지만 보도 이후 호적정정을 결정한 법원의 내부 서류가 법원내부자에 의해 바꿔치기 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검찰이 뒤늦게 나서 수사를 벌였지만 '서류 바꿔치기' 즉 공문서변조는 인정되나 '누가 했는지는 알 수 없다'며 사건을 기소중지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2003년 형제 9668호, 대전지검 천안지청> 법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검찰은 그렇다쳐도, 법원행정처는 과연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누군가에 의한 이뤄진 '서류 바꿔치기' 덕분에 항고가 불가능한 법원의 직권 호적정정 결정이 항고되는 기상천외의 재판이 시작됩니다. 벌써 10년째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소송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 버린 채 '누군가들'에 의해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애국지사 가문의 족보 위조사건. 정의가 거꾸로 박힌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할 뿐입니다. 대전지역 기자분들은 물론 뜻있는 기자분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사건번호 2011브44,45  대전지법 제4민사부 호적정정 사건 - 2011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