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로도에서 만난 파도> 지척에 두고 도망해온 삶 뒷걸음칠 골목도 얼굴 가릴 명분 따위도 이곳엔 없다. 남해안 작은섬 외나로도. 고흥반도 끝 내나로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드문드문 몇해 전부터   외지인들이 들이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여행객들이 섬 사람들의 구경거리인 곳. 인적이 드문 이 섬에 밤이오면 잠들지 못한 당신은 외나로도를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이 된다.   형제들이 잠든 바닷가 텐트 안에서 나는 그렇게 홀로 남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점 불빛 남지 않은 외나로도. 텐트의 안과 밖으로 밤의 어둠이 들이친다. 텐트는 아무것도 가리지도 구분하지도 못한다. 다만 바닷가엔 어둠과 그 어둠을 밀어내 쏟구치는 또 다른 어둠이 있을 뿐. 그때 파도를 들었다. 파도.. 그것은 함성이었다. 87년.. 광화문.. 그곳에선 사람이 파도였다. 거리를 흘러넘치던 격랑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아우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잠든 형제들을 바라본다. 잠들었다는 이유 만으로 저 엄청난 세상과 이리도 무관할 수 있는 것일까. 텐트를 나와 바다로 두려움에게로 한발짝 나아갔다. 그때.. 해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몰려오고 있는 한 떼의 파도! 그것은 절규였다. 저 멀리 수평선 끝으로부터 줄지어 몰려오고 있는 또 다른 상륙부대의 위용을 보았다. 무슨 외침이길래 저토록 간절히 육지를 향하는가 미지의 땅 끝에서 밀려온 태고의 소리가 두려워 나는 소라게 처럼 텐트 속으로 움추려든다. 처-얼썩 -- 처-얼썩 - 알 수 없는 저 - 대양의 신호 이어지는 외침 얼마나 사무치는 사연이어늘 대양 심연을 건너 대륙의 발치에 닿아 처참히 부서지고 마는 것일까.   땅 속으로 스미는   저 생명이여. 꿈처럼 먼 바다의 갈매기 소리가 울리자 또 한 떼 곳추선 파도의 무리가 엄습한다. 출렁이며 어깨거는 것들 저것은 산맥이다. 저것은 역사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세기말 바다는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의지의 부호를 끊임없이 흘려보내고 있다. 더 이상 눈감을 수 없어 크게 숨 들여마시고 두 눈 부릅뜬 채 파도를 본다. 새벽 바다에 파도의 모습이 더욱 또렷히 도드라진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 꿈뚤대며 기어나오는 희망이었다. 너른 백사장에 희망이 벗어놓은 절망의 손 무덤들이 가득하다. 살아남은 자들의 키스가 생환의 해변에 가득하였다. - 외나로도에서 만난 파도 (93.8.2) (주: 대학원 시절. 진로 문제를 두고 남들 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했었지요. 만일 제 인생이 저나 또는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것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 고민들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믿습니다. 저는 93년 여름. 처음으로 밤 바다를 보았고, 마주 했습니다. 아주 두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종종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하게되면 그때 그 밤바닷가를 생각합니다. 바다가 죽음을 건너온 희망의 카니발임을 알아차리고는 얼마나 가슴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말이죠.. 우리도 조그만 희망 하나씩을 손에 쥐고 하릴없이 인생이란 대양을 떠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언제, 어느 해변에 당도할지는 모르지만 그 해변에서 생환의 기적을 확인하는 순간을 생각해봅니다. 이런 생각.. 고된 '지금'을 감수할 수 있는 작은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을입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