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미국취재 여행의 여독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밤낮이고 무기력증에 졸립기까지 하다. 그런 사정과는 별개로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더미들은 모두 나의 집중을 촉구하고 있다. 준비해야할 소송 서류와 검토해야할 기사들 그리고.. 연말과 연초를 송두리째 들여 다녀온 이번 미국취재의 결과물은 이제 구정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방송될 예정이다. 전두환씨 해외 비자금 추적 기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무기 중개상 조모씨 사이의 숨은 이야기 등이 기다리고 있다. 취재는 우려했던 것 보다 성공적이었다. 해외취재는 보통 기대 보다 절반 수준에서 이뤄지고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가는 도시마다 올바르고 또 고맙기 까지 했던 마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대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도움까지 얻어 비교적 완성도 있는 취재가 되었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 취재의도를 십분 이해하고 함께 해준 그들 모두가 정말 고맙다. 위의 사진은 한인타운이 자리잡고 있는 뉴욕 32번가 입구에서 열렸던 이라크 파병 반대집회다. 사진 가운데서 촬영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와 함께 단둘이서 미국 출장에 올랐던 김상범 피디다. 김 피디는 이번 취재에서 영상취재를 담당해주었다. 사진속의 시간은 12월 31일, 밤 10경.. 그러니까 한해가 가지 2시간전의 모습이다. 취재를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한인타운 쪽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문득 집회 현장 앞을 지나던 나와 김 피디의 눈이 마주쳤다. 재미동포와 일부 미국인이 함께하는 이라크 파병 반대집회라.. 그것도 가는해의 마지막 시간에 뉴욕에서 펼쳐지고 있는 진풍경이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의 눈짓에 김 피디는 바로 촬영장비를 꺼내들었다. 옷깃을 파고 드는 칼바람 속에서도 그는 아무 불평 없이 취재를 해주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지상에서 다시는 없을 2003년의 마지막을 함께 보냈다. 그런 김상범 피디에게 감사한다. 그의 성실한 취재가 없었다면 이번 미국 취재는 반쪽짜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차가 지나온 자국처럼 선명하게.. 세상살이 지난 온 자리에는 온전히 사람의 체취만 남는다.